개신교와 가톨릭

2014.08.19 01:00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어떻게 해서 하나였던 교회가 둘로 나눠지게 됐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안탑깝게도 현재 한국교회 안에는 가톨릭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너무나 많이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굳이 일일히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마리아 숭배라든지, 가톨릭이 이단이라든지 등등...


이러한 분들을 위해서 광주다일교회에서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었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고 계시고 독일에서 종교개혁사(루터를 중심으로)를 전공하신 홍지훈 교수님을 모시고 "개신교와 가톨릭"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약 1시간 가량의 짧은 시간의 세미나였지만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들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를 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 되어집니다.




하율이 아빠 신학앎

  1. 이 강론에서는 오류가 있네요 첫번째로 카톨릭이 이단이 아니다? 그렇다면 연옥이라는 카톨릭만의 믿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 바탕인가요? 성경어디에도 연옥에 대해서 아니 비슷한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틴루터가 꼭 자신의 교리를 펼치기 위해서 그때 당시의 시대적배경을 바탕으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돌려말하시는데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짓으셨을까요? 물론 마틴루터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마틴루터는 그 교황 및 성직자들의 모습에서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 행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카톨릭은 1500년시대 이후 변화가 되었나요? 성경에 공회를 만들고 모든 교회를 한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라고 하셨나요? 참고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것은 하늘의 아버지와 친부뿐이지만 카톨릭은 성직자들을 FATHER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교황을 그리고 그외의 성직자들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성스러워질수 있고 신격화 할수 있나요? 카톨릭교리중에 오로지 베드로의 제자들만 교황의 자리에 오를수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무도 아니고 오로지 베드로만이 의로운 사람인가? 성경에 베르로가 반석으로 그 위에 교회를 지은다고 해서요?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들은 그저 유대교인들과 다를게 없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것은 신성 거룩함 이러한것들이 한 족속 한 민족 혹은 당신들이 말하는 베드로의 직계제자들 이러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 우리의 믿음으로 죄를 자복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모두가 그리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그것을 부인하죠 왜냐면 계급주의적으로 교황 성직자 성도 그런식으로 구분을 짓고... 아무튼 그렇게 자신있게 카톨릭이 개신교와 같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연옥을 어떻게 설명하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을 내가 받아올수도 있다는 교리를 설명해 보세요 이러한 것들이 틀린거지 단순히 그 뿌리가 같은데 사람의 생각차와 시대적 부패가 둘을 갈라놓았다고 말하지 마시고요 잘 알지못하는 사람들을 그런 맞지도 않는 지식으로 현혹시키지 마시고요.

  2. 루터는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 비춰서 가톨릭 안에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비판을 했던 거였고 교황과 로마교회가 루터를 압박했을 때 솔직히 뒤로 물러 선 것은 사실입니다. 변명을 했지요. 그럼 종교개혁은 어떻게 되었냐면 이미 95개의 반박문이 유럽으로 퍼져나가서 종교개혁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이건 엄연한 사실이고 루터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물론 님께서 지적하신 당시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부정과 부패는 비판받아 맞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와 가톨릭을 비교한다면 500년 종교개혁측과 가톨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는 정말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가톨릭은 2차 바티칸 공회 이후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든다면, 조용기, 홍재철, 전병욱, 오정현 목사등 나름 한국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고하 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500년 전 루터가 비판을 했던 주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반에서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종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이 아프고 병든자를 고치고 그들을 안아 주셨던 것처럼 그도 행동하고 가톨릭 교회도 그렇게 행동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이야기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내세사상과 기복신앙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야 진정 성경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를 신격화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직제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해서 뭐라고 답변을 드릴 수 없지만 먼저 신부가 왜 영어로 ‘Father’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냐면 초대교회 이후로 교부시대에 들어 가면서 ‘Father’라는 단어가 교회 속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이 교부를 라틴어로는 ‘Patres Ecclesiae(파트레스 에클레시에)’라고 하는데 이것을 영어로 ‘Church Father’라고 번역을 했고 우리는 ‘교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이건, 정교회이건, 개신교인건 성직자를 존중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을 하지만 신격화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생각에 어느정도 동의(신격화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Father’를 신부의 ‘Father’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님의 주장의 맥락을 따랐을 경우 우리는 기독교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교부들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에 이어서 제가 아는바로는 베드로의 제자들만 교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틀린 주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황’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생겼났고 정착이 됐는지를 여기서는 다룰 수 없어서 다 설명 드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라는 책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서교회 분리과정과 몇 가지 사건으로 ‘교황’이라는 용어가 생기 된 것을 잘 설명해주 주고 있습니다.

    이제 제 의견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파되어진 지역에서 그곳에 맞게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과 북한이 반세기 동안 분리되어 살면서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한겨레라는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떨어져 살던 여러 교회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 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즉 본질은 지켰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톨릭이건 정교회건 개신교인건 서로가 봤을 때 성경적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을 하는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좁고 너무 배타적으로만 바라 보시지 말고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너그럽게 나와 다른 기독교를 바라 봤으면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사랑으로.”
    님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평화 :-)

  3.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전 현재 신학을 공부하고 또한 여러가지 위치에서 개신교 목사들의 잘못된 점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사람이며 위 답변에서 말씀하신것처럼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잘못을 알며 수년전부터 우리 개신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느낀사람중에 한사람입니다. 현재 전 기독교인의 두얼굴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중이며 여러가지 자료를 찾던중 우연치않게 들어와서 이글 저글 읽어봤습니다.
    우선 답변에서 부족함을 찾자면 제일 우선시 되는 카톨릭의 믿음의 주체와 구원의 방법입니다. 개신교는 오로지 본인의 회개와 믿음으로 되는 칭의라는 개념이 있고 오로지 믿음만이 구원의 주체가 되며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 부터 온다입니다. 그런데 동영상에서 말씀하신것처럼 카톨릭은 전혀 성경에 나오지도 않은 연옥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누구든지 죽어서도 내가 아닌 내주위의 사람이 나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고 덕을 쌓은 사람에게 덕을 받아오면 천국에 갈수 있다는게 주된 교리인데 이게 과연 맞는것인가요? 이런 주장을 하는 종교가 이단이 아니면 뭐가 이단인가요?
    다음으로 요즘 대형교회들 문제가 참많은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세상을 다니며 선교 활동도 하고 교회도 지어주고 가난한자들 못먹고 못입는 사람들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답글에서는 그들은 죄만 짓고 다니는 사람인것 처럼말씀하시고 오로지 프란치스코 교황만 올바른 선을 행하다고 말씀하시는것 같아서 동의 하기가 힘드네요 카톨릭 역시도 그안에서 온갖범죄가 생겨나고 그러나 자신들이 묵인하고 세상에 알리지 않아서 그렇지 간혹 주교들의 아동성범죄가 종종 뉴스로 올라옵니다. 그외에도 많을거라 생각하지만 워낙 잘 만들어진 구성 집단이다 보니 자체적으로 무마하고 넘어가는게 많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뭔가 올바른 것을 봐야지 단순히 이치에 맞추고 세상살이에 맞춰서 내가 보고자 하는것만 본다면 그건 장님이 코키리 코만 만지고 코키리를 표현하는것 처럼 과연 우리가 내생각으로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내 생각에 맞춰서 이럴꺼야 그러니 여러분도 이렇게 믿으세요 이건 양치기로써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더 성경을 보고 진정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도 열매가 없는 나무는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평화와 자유만 찾는다면 자기합리화와 자기만족에 빠져서 진실이 무엇인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4. 아하 신학을 공부 중이시군요. 댓글이 젠틀한 이유가 있군요. 앞으로는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홍교수님의 강의 중에서 나오는 연옥의 유래를 다시 한번 들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신학과 세계관의 한계 내에서는 연옥이라는 것은 신자들에게 ‘누구나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 보면 연옥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언급을 하지만 천주교 또한 행위를 중요시 하는 만큼 믿음의 중요성도 강조를 한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사님께서 현대의 가톨릭이 연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시면 천주교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 직접 한번 물어 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저는 가톨릭을 대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 적어 보자면 1990년 가톨릭과 루터교는 칭의교리에 대한 신학적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qvayPJ”를 참고해 주세요. 그 기사의 일부를 발췌 하자면

    “즉, 가톨릭은 ‘오직 믿음’의 차원에 ‘사랑’과 ‘소망’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역시 ‘구원’(이신칭의)은 결코 ‘성화’(사랑과 소망)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루터교는 ‘이신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지만 분리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종전보다 ‘성화’를 더 강조했다.”

    가톨릭도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세계감리교와 세계개혁교회연맹(장로교 연합단체)는 이 신학적 합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교회의 주 흐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 신학과 교리에서 각 교회들간의 이견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본질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한다면 우리는 모두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뭐라고 답변을 못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칭찬을 한 것입니다. 이해 반해 한국 개신교는 개교회주의가 강하기는 하나 교단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전 댓글에서 언급했던 목사들의 잘못이 발견이 되었으면 교단 차원에서 반응을 하고 자정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꼬집은 것입니다.

    논문 잘 준비하셔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좋은 대화오 토론은 환영입니다.
    평화 :-)

  5. Blog Icon
    길선

    개신교는 일단 교리는 맞다고 봅니다. 다만 신자들이 더러운 짓들을 해서 그렇지요. 저도 크게 죄인이구요.

    저도 한때는 진리를 찾아서 개신교에서 발을 빼고 천주교로 가려했었습니다. 1년간을 평화방송 미사 일요일날 교회 끝나면 집에서 드리고,
    정말 지극정성으로 꼬박꼬박 챙겨서 했었네요.
    개신교의 성의 없는 믿음생활과 친절한 냉대에 질린 반면에
    천주교는 어딘가 화끈하고 보다 성의있게 열심히 신앙생활들 하고
    무엇보다도 나 역시
    성당에서 두어번 미사를 드리면
    어딘가 정신적으로 신앙심이 더 깊이 들고 그랬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원인은 바로 책인데요.
    <성스러운 호소>를 보고는
    주님께서 개신교는 마다하고 천주교에 역사하여 주신다, 하여 천주교로 옮기게 되었던 거예요.

    그렇게 기회를 봐서 천주교로 옮기려고 했었습니다.
    도대체가
    매일미사나 묵주기도 내용이

    너무너무 힘들었는데도 그렇게 1년간을 했었네요.

    내가 전에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천주교 신자 언니 한명이 저를 그렇게 잘 챙겨주었고
    퇴원 후 집에서 인터넷을 하는데
    댓글로 알게 된 정 엘리사벳 자매님께서도 저를 그렇게 잘 챙겨주시더라구요.

    정말 천주교 신자들은
    대게가 개신교인들더러

    병신이니 개독이니 나한테도 수없이 욕들을 했지만

    정말로 신앙심이 대단하신 분들은 저렇게 남을 잘 챙겨주고 겸손하고 친절하시다고..어떻게든 착할려고 하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천주교만 가려하면

    이상한 나쁜 일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평화방송 채널만 언제부터인가 잘 안나오거나 방송사고가 나거나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요인에 의해서

    나는 개신교로 뿌리박게 되었는데요.

    두번다시 절대 천주교로 가지 않겠다,

    그동안 모아둔 자료들 다 폐품으로 내놓게 되었습니다.


    후에

    저는 인터넷에서

    마리아가

    어느 여신 숭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평화방송 채널은 정상작동되었으며

    그러나 나는 이제 안봐도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남의 소유를 무시하는 못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그들이 선택한 취미같은 소유물이죠. 착하게 살기 싫으면 불교를 버리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장난이 허용이 안되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에 속한 자들입니다.


    천주교 교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갈 수 없는 거,

    예수님께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마리아님이 기도를 전달해준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마리아님이 우리의 기도를 전달해주고 설득해준다고.. 이게 말이 되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예수님 한분으로도 우리는 족하고 충분한 생수를 마십니다.

    마리아님이 왜 굳이 또 필요할까요?

    마리아님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정도의 믿음을 가지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 정도의 믿음을 가지신 분이,

    완벽하신 믿음과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살아생전에 어머니셨어도.. 아무리 예수님을 낳았대도

    어머니로서 말도 함부로 못했습니다. 언제나 존칭을 쓰며 높여드렸는데요.

    아무렴 예수님이 마리아님보다 더 많이 알았으면 알았지

    그분이 마리아님한테서 뭘 배운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아무리 마리아가 설득해도

    예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고 더 배워서 알게 되면

    언제나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물어나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나는 생각하는데요.


    예수님은 마리아님이 설득이나 해줘야 우리를 봐주시는 그런 냉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마리아님이 가기 전에

    우리한테 가장 먼저 달려오십니다. 그분이나 우리나 마리아님이 굳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구끝까지 우리가 죽기까지도 절대 포기를 안하시는 분이십니다.


    뭐 우리가 죽고나서 예수님께서 못 도와주신다면..

    끝난 겁니다. 마리아님은 상관이 없습니다. 마리아님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예수님이라면,

    마리아가 더 믿음이 세고 사랑이 깊고 구원자입니다. 그러나 아니죠. 말도 안됩니다.


    그건 예수님과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당엘 가보면

    마리아 상 앞에서 모두가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 내 생각에

    너무나도 바보같은 짓들입니다.

    마리아를 존경한다는데

    너무 바보같습니다.

    왜 존경하는데요? 대체 그분이 뭘 하셨다는 건지...?


    순결을 잘 지키셔서 예수님을 깨끗이 세상에 보내주신 일 말고는 한게 뭐 있다고 물론 그만도 정말 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보통 사람들 다 하는 거 외에 다른 건 크게 알려진 게 없습니다. 최소한 얼마나 대단하신 위인이시던간에,

    그렇게 예수님보다 더 높이 추대되며 구원자 이상의 최후의 영웅대접을 받으실 위인은 아니시라는 것이죠.

    이건 완전 도가 지나치거든요.

    하나님은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시는데요.

    묵주기도는 매일 반복해서 마리아에게 복제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마리아님께서 그걸 들으실까요?

    매일같이 세뇌하듯 복제기도 드림으로써

    예수님께로 가야할 신자들이 죄다 마리아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 더 가까이 하며 그만큼 더 친숙함을 느끼면서
    예수님보다 마리아랑 더 가깝습니다.

    마귀의 책략인 거죠. 예수님과 연을 맺어야할 백성들이
    마귀로인해 예수님께고 못가고
    사이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님도 천상에서 보시면서

    다들 왜 본인을 그렇게 숭배를 하지? 하고 안타까워하실 것 같으네요.

    성당에 가면

    우리를 구원하신 청년예수의 모습은 없고

    맨날 태어난 갓난아이를 받쳐들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마리아상이 가득합니다.


    정말 속으로 바보같다 생각했네요.

    대체 그 마리아가 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면서 다들 상체를 조아리는 모습이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런 말이 너무 우습습니다.


    존경은 예수님으로도 족합니다. 하나님은 감히 존경이라는 어설픈 개념을 들먹일 수가 없을 정도로 무서우시고 찬양받으실 분이시구요. 그나마 예수님께서 자신을 엄청 낮춰주셔서 우리가 존경이라는 것을 어설프게나마 감히 느낄 수 있는 건데요.

    평생동정이라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아래로 동생들을 두셨습니다. 성경 4복음서에 나오구요. 그거 쓰신 분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들이 무사히 성경에 거짓말을 쓰게 결코 그냥 안두십니다.

    성경 66권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인데

    하나님께서 미신이 들어간 7권의 외경을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십계명 제 2계명이

    이 세상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만물들의 형상을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 모양의 인형들,
    동물 모양의 돼지 저금통들, 황금 두꺼비,
    미니어처들.. 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기로 복사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인쇄물보다

    자신이 직접 쓴 손글씨를 더 값어치 있게 여겨주시구요.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을 존중하시고 사랑해주십니다.

    복제는 사탄이 만든 겁니다.
    우리는 오늘도 수없이 복제와 삭제를 컴퓨터에서 합니다.

    그걸로 세뇌되어

    인간경시, 생명경시의 정신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벌써 사람 신분을 모델넘버로 지정한 LG회사 (Lucifer is god, 또는 goat)나

    신한은행 두 가지를 제가 알고 있구요. 아마도 더 있겠죠. 어딘가에도요.. 시간나는 대로 다 찾아보려네요.


    마리아의 기도를 하는 성물들 있죠.

    뭐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열심히 기도한다는 논리같은데요.


    우리는 예수님 말고는 스승이 없습니다. 뭘 겉모양을 보고서야가 아니라
    내 정신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며 우러나와야 합니다.
    만일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른다면

    기도로써 간구하고 답을 구해야지

    우리는 신앙생활 만큼은
    같은 인간을 보고 배워서 하는게 아니라예수님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물론 어쩌다 참고적으로 내 옆 친구의 행동을 보고 잠시나마 한 순간 깨닫는 일은 있어도

    매번 그 우리랑 똑같은 어설픈 죄인을 갖다가 보고 따라하고 배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황.. 교황이 신의 대리자라는게 말이 안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합니다. 다 같은 죄악의 죄인입니다.

    마굿간에서 자라시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가난한 동내에서 온갖 못난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앞에서

    본인이 황금빛 망토를 두르며 금관을 쓰고 고급 지팡이를 휘두르며 황제노릇으로 자신을 엄청나게 높이는 사람이

    무슨 신의 대리자인가요? 지금 그 사람은 그 패션들 다 벗어서 집어 내던지고

    당장 주님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고

    사람 위에는 바로 주님이신데,

    예수님도 자신을 낮췄는데,

    아무리 덜 익은 벼가 고개를 뻣뻣히 쳐든다지만,

    지금 같은 죄인끼리,

    누가 누구한테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고 애들 머리를 쓰다듬고 황금망토 두르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어설프게 흉내내며 황제놀이인가요?

    그 높으신 예수님도 애들 머리 안쓰다듬으십니다. 애들을 오히려 목마태워 더 높은 자리로 올려주시죠.


    천주교 자체가

    프리메이슨이 잡입한 종교입니다. 물론 신자들은 선량하게나마 모르고 믿음생활 하시겠죠.

    그들은 부모 대부터 그렇게 내려와서 믿는 경우가 많으십니다. 감히 그 종교를 떠날 생각을 못해요.

    자랑스런 천주교인이라지만,

    우리 인간은 자랑할 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랑이지

    종교 자체는 자랑거리 못됩니다. 어설픈 인간의 집단인 것이구요.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빛나는 거죠.

    그들의 자부심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들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이들은 또 다른 사람으로 봅니다.

    같은 천주교인들끼리도 쌍욕을 퍼붓고 싸우는 거 여럿봤구요. 뭐 신고한다느니 무서울 지경이었네요.

    하나님은

    교황도, 천주교인들도, 우리 개신교 죄인들도 그 외의 모두들 다... 사랑하십니다.


    자신이 속한 종교에 애정을 가진 만큼 누가 잘못되었다 욕하면 당연히 화가 나죠. 아직도 내 자신이 한없이 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으로, 종교가 내 소유물인 양 그렇게 욕심을 내는 죄를 범하고들 있는데요.


    그러나

    정말 좀 융통성 있게,

    무조건 나는 이 종교만 평생 믿기로 작정했다, 이런 고집보다도

    세상에 완벽은 없으니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니,

    완벽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우선으로 중심으로 두고 옳은 길을 찾았으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면 천주교가 옳다고 하시면 천주교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하십니다. 개신교가 바르게 가고 있는 거라고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그래서

    착하신 천주교 신자분들도 많이 계신데,

    천주교 윗 세력들이 프리메이슨이고 일부 정말 아무것도모르고 믿는 여럿 신부들이나 작은 교황들이 탄압받으며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는 등 여러 어지러운 사건들 때문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믿는 신자들 모두 정신 차리고 정말 자존심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개신교로 피신했으면 합니다. 천주교 시스템 절대 주님과 무관한 것이니까요.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이후로 개신교의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요.

    그러나 우리나라 역시 프리메이슨이 정치계에 잠입하면서

    개신교 쪽에도 잠입을 했네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대형교회의 내로라하는 목사들 다 프리메이슨으로서 기독교 욕먹일 짓들만 일으켜왔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런 목사님들이 퍼뜨린 세상에서 살면서

    썩은 설교, 썩은 교회운영, 썩은 믿음, 썩은 악행 등등을 저지르고 부추키면서

    기독교 붕괴를 목적으로 한 짓들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러했구요. 그러나 영적 깨달음과 분별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요즘도 엄청난 죄들을 짓지만 가까스로 정신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보다 바른 신앙의 길을 가려고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 처럼

    나 역시 새로 거듭나려 합니다.

    모두가 정신 차리고

    마귀에 미혹당하지 말고 속지 말고 헷갈리지 말며

    승리의 천국의 길로 갔으면 합니다.


    참고로

    하느님인데 왜 하나님이냐고들 하십니다.


    하느님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한분이시라는 하나님의 특징, 그분이 어떤 분이냐를 말해주죠.

    국문법에 어긋난다고 하지만,

    그깟 국문법.. 하나님께서 없앨라면 없애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도 계십니다. 고로 하느님은 맞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의 종교 존중할 줄 몰라서 불교 등등을 수용안하는게 아니라는 것을요..

    하나님은 그분 이외에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종교 옳다고 외치는 종교를 왜 만들고 왜 섬기는지요? 그런 종교라면

    진정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교는 아니라고 봅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 을 외치지는 않습니다. 그건 잘못된 전파죠.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성경을 믿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고로

    성경으로 배우고, 생활하면서도

    현실에서 실천하고

    하나님의 중심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모여

    서로 영적 교제를 하고

    여기저기 배우고 깨우치고 깨달음을 얻어가며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하는 거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동안 잘못된 기독교 사회가 잘못 가르쳐왔던거죠.

    정말 그 핵심들을 봤으면 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블로그 쥔장님은 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의견 드려봤습니다.


    참고로,

    평화방송 주일미사프로그램 끝나면

    일루미나 스테인드 글라스협찬이라고 나옵니다.


    난 그 일루미나라는 이름이 참으로 요상스럽습니다...하고 많은 이름 중에

    일루미나 라니...

  6. 전 별로 음모론자들과는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LG가 뭐라구요? 'Lucifer is god, 또는 goat'이라구요? 지나가던 개가 듣고 웃겠습니다. Lucky Goldstar의 약자인데 해외진출할 때 이게 촌스러워서 Life is good의 약자로 한 걸로 아는데 이런게 다 위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생각하는 것이야 자유니까
    참 LG에서 안만드는 것도 없고 안 파는 것도 없는데 집 안에 LG 딱지 붙은 것들 빨리 내다 버리세요 그러다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겠습니다 ㅋㅋㅋㅋ
    참 GS도 원래 LG와 같은 계열있던 거 아시죠? 아이고 GOAT is Stan이네 GS에서 기름 넣으면 지옥가겠네요? LG폰가지고 LG 유플러스 인터넷으로 인터넷 하지 마세요 그러다 벌 받아요

    그리고 평화방송 튼다고 사고난다는 이야기는... 참 무속신앙인들 다운 발상을 하시네요. '신 내림 받기 싫어서 피하니까 아프고 사고나고' 이거나 '개신교 라디오 방송 안 듣고 평화방송 듣다가 사고난다'나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교황의 행보에 관해서 참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은데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람들을 만나고 위로해 주면서 화려한 옷을 입고 다는 것을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박사학위 가운 입고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은 잘하는 행동인가요? 칼빈이 검은 가운을 입고 설교한 것은 세상의 헛된 것을 검은 가운 안에 다 숨겨야 한다고 했는데 어째 장로교 목사님들은 박사학위 자랑을 설교시간에 하는 것인지 참 한심합니다.

    성경이 66권 떡재본으로 하늘에서 떨어진거라 믿는건 아니시죠? 원본은 있나요? 원어에서 한글로 하나의 오류도 없이 번역 된 것은 확신한가요? 완벽하고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성경책 마태복음 17장 21절, 18장 11절을 한번 확인하고 와서 성경이 66권이 어쩌고 저쩌고를 한번 다시 말해주세요.

    그리고 마리아가 결혼하여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를 둔 것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의 어머니 부터 부정하다고 말하세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그 이유 하나로도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분입니다. 데오도코스라는 개념은 아시죠? 다른 종파의 신학적 주장은 신학적 논쟁으로 답해야지 감정으로 답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개성개성 계속 말씀하시는데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개성은 개성이라 적어놓고 꼴통, 또는 꼰대라고 읽혀집니다.

  7. Blog Icon
    누룩을조심하라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갚아주신다 하셨습니다. 악한자는 그대로 악하고 선한자는 그대로 선하라 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그냥 그대로 두라 하십니다. 추수때가 가까움이니..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덩이에 빠지리라.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말세지말입니다. 논쟁하지마세요 진리는 논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의지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의로 구원받는 것은 더욱 아니구요. 그냥 은혜만 구하십시요. 두드리면 열릴것이라. 깨어 기도하게 하옵시며 환난을 감하여주옵소서..

  8.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건지요?
    누룩이 세상을 바꾸기도 합니다. 마13장.

  9. Blog Icon
    김전도사

    ㅋㅋㅋㅋ어쩌다.. 흘러흘러 글들을 많이 보게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신학(M.div) 과정중 입니다) 여러 글들과 댓글을 살펴보니 주인장분께서도 자신의 논리와 변증이 있으시고, 반대하시는 분들도 잘 정리해서 말씀해주셨네요.
    서로 이만큼 대화가 오고갔는데 마음의 미동이 없다면, 서로 여기서 그쳐야겠지요.
    그래서 저도 그냥 나가려다가, 바로 위에 '누룩을 조심하라' 분 댓글을 보고 빵 터져서 한 자 적고 갑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되는 것은 바로 구원관이죠. 지극히 당연하게도 주변의 여러 종교들만 보아도 그 구원관은 같지 않습니다.
    만약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구원"에 초점을 두지 않고 다른 "주변요소"들을 지적하며 서로 맞녜, 아니녜, 어긋나녜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너무 과한 배려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구원관에 집중하십시요.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시는 구원관을 선택하세요. 그리고 선택하신 종교의 신자가 되십시요. (주변만 맴돌지 마시고)
    혹여 그 수많은 구원관들이 합해질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만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부디 성령님께서 주인장분의 마음에 진리를 비춰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10. Blog Icon
    하율이 아빠

    저는 다른 종교의 구원관을 옹호한적이 없는데요
    물론 많은 댓글 중 그런 비슷한 뉘앙스의 글은 있을 수는 있겠죠.

    설마 가톨릭을 타종교로 생각하는건 아니시죠? 기독교는 가톨릭/오순절/개신교/정교회 이렇게 크게 4종파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영역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부족한 인간으로써 과연 누군가의 영혼이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를 정확히 판단할 수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상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종교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그것만이 최종목표이면 뭐하러 힘들게 이 땅에서 살아가죠? 힘든 세상 빨리 끝내고 천국가면 그만일 것 같은데 말이죠.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사람들이 구원론 만들고 거기에 맞는 교회론 만들고 교회론 나오니까 기독론이 나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기독론, 교회론, 그 다음 구원론이 나와야 순서 맞다고 생각하는데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기독론보다 먼저 나오면 예수의 모습은 반드시 왜곡됩니다.

    제가 왜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중요하다고 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행위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이 임하였지만, 아직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맞겠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각자의 삶에서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것이 되고 그게 누룩의 삶이 아닌가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비유 장이니까 잘 살펴 보세요. 특히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말하고 있잖아요.

    신학을 공부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제 댓글의 누룩 보고 빵 터졌다 하지 말고 성서학을 조금 더 열심히 하시고 특히 예수님의 비유를 시대적 상황과 잘 맞춰서 연구도 해보시고 아는게 많다고 목회 잘하지는 않습니다. 삶에 실천이 없으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교회랑 신학교 안에 있다고 예수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생가도 버리시구요.

    저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잘 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전도사님께 진리를 비춰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신앙삶

2014.07.29 16:32
본 글은 2012년 8월에 열린 오이코스 여름학교 워크북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번 오이코스 여름학교가 8월 20일(월)-23일(목)가지 전남 장성 한마음공동체에서 "생명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우리를 악에서 이끄소서"란 제목을 가지고 문이 열린다. 오이코스 여름학교란 세계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에큐메니칼신학을 함께 연구하기도 하며 예배, 성서묵상, 특강, 생명밥상, 세계신학자들과 신학 talk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신학캠프이다. 여기에 국내 교수 20여명과 목사 10여명 그리고 세계신학자 7명이 1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신학을 예배로, 성서연구로, 밥상으로, 춤으로 그리고 삶으로 나누어 가지는 재미있고도 유익한 여름학교가 될 것이다. 신학을 하는 대학생들과 대학원 학생들이 100여명 신청을 하였지만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은 열어놓을 작정이다...

지난해 다룬 주제들인 성정의, 다문화, 동물권, 빈곤과 경제정의, 기후변화, 원자력발전(핵문제), 전쟁과 평화, 한반도 평화통일을 보다 더 심도있게 다루고자 8명의 교수들이 그 주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신앙고백 등을 연구정리한 것을 5-6장정도로 요약하여 자료집에 싣기로 하였다,

그 중에서 본인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관한 주제가 맡겨졌기에 정리한 것을 여기에 실어본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신앙삶 - 정경호 교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유대 사람과 여러분 이방 사라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에베소서 2:14절, 현대인 성경)

I. 평화와 통일이 이야기

우리는 분단된 지 67년 동안 목청이 터져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고 불렀다. 북은 북대로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조선, 백두산의 줄기가 내리어 이 땅은 하나의 강토. 통일이냐 분열이냐 엄숙한 이 시각에, 겨레여 나서라 투쟁의 한 길로 조선은 하나다.”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총칼을 겨눈 1950-53년의 한국전쟁은 너무 끔직해서 남한의 경우 24만 5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실종된 사람이 30만명, 부상당한 사람이 33만명이 훨씬 넘었다. 특히 학살당한 자의 수를 13만명으로 그리고 북한으로 납치당한 수를 8만 5천명으로 잡고 있으며 30만에 가까운 전쟁미망인, 10만명의 고아가 발생하였고 전쟁으로 흩어지고 헤어져서 생사를 알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수가 무려 1,000만명이 훨씬 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잠시 휴전을 한지 벌써 어언듯 60년이 가까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파멸되기를 바라는 상쟁의 마음으로 대치를 하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II. 본문이해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신앙에 굳게 서서 함께 하나가 될 것을 당부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의 같은 형제자매끼리 지난날의 어리석은 분열과 다툼과 상호불신의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유다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또는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나아가서 바울은 자신의 민족은 물론 모든 인류와 만물이 평화를 누리며 함께 하나 되는 통일을 꿈꾸고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정의․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실현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로 12절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죄사함을 받게 한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밝힌다. 특히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구원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 곧 통일을 이룩해야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평화와 통일로 인하여 거룩한 하나를 이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울은 2장 14-15절에서 그리스도야말로 원수가 된 둘 중간에 막혀 있는 담을 허물어 버리시어 둘을 하나 되게 하시는 평화의 주(14절)이심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의 이야기 중에서 둘이 하나 된 참으로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쌍둥이 형제, 원수가 된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만남이다. 창세기 27장에 의하면 동생 야곱은 늙은 아버지로부터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교묘하게 속여 가로채고 만 것 때문에 그들 형제들은 원수가 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형을 피하여 외삼촌이 거주하는 멀고도 먼 밧단아람이란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창세기 33장에 의하면 야곱은 그곳에서 14여년을 살면서 결혼하여 두 아내와 많은 자녀를 두고 살았으니 고향이 그리워 결국 생명을 건 귀향길에 들어선다. 그리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얍복강을 건너 형 에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4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는 형을 보았다. 이러한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야곱은 겁이 나고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때 형 에서가 달려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동생 야곱을 와락 끌어안았던 것이다. 두려움에 쌓여있던 야곱은 자신을 감싸준 에서를 향해 말하기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서로 화해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형 에서의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마음, 따듯하게 환대하는 마음, 넓디넓은 너그러운 마음을 본 동생 야곱은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 같다고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나눠진 모습과 함께 하나가 둘로 나뉜 에서와 야곱의 모습과 분단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원수가 된) 우리 유대 사람과 여러분 이방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엡 2:14, 현대어번역) 
그렇다. 바울에게 보인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가 된 둘 중간에 막혀 있는 분열과 분단의 담을 단번에 허물어 버리시고 나뉜 둘을 하나로 만들어 내신 평화의 주 곧 평화통일의 주이신 것이다. 바울은 한 지역이나 민족의 평화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인류와 세계 나아가서 온 우주의 생명공동체가 평화를 누리며 함께 하나 되는 평화통일의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생명․정의․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해방의 해인 희년인 것이다. 즉 희년곧 정의를 수반하는 평화의 계약과 그것 위에 수립된 해방의 해는 하나님의 통치적 주권에 대항하는 제국들의 지배, 즉 이집트의 바로 제국, 바벨론 제국, 앗시리라 제국, 희랍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과 그 주변 왕국들의 지배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의로 타의로 이런 제국들의 지배에 굴복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안전이 파괴되고 평화가 깨어져서 희년의 법의 실현이 강력하게 요청된 것이다. 희년이라고 하는 평화의 계약은 제국들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뭇 민족들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 초강대국들의 이념과 그들의 이익에 의해 둘로 나누어진 우리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III. 평화통일을 향한 신앙고백

1988년 한국기독교협의회인 ‘KNCC’는 ‘통일선언’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분단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인간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해방시켜서 하나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나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삼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종말론적 미래를 보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 선언문은 분단사상 처음으로 한국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통일선언문을 만들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 어느 쪽도 그리고 어느 정권 그 누구도 감히 분단의 죄책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분단의 죄책을 먼저 고백한 것은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 쌍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고백”은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에서 먼저 출발하고 있다. 그런 후에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마 22: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고 고백한다.

한국기독교협의회는 계속해서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1-20, 44:2-7)를 범했다”고 고백하였다. 나아가서 우리 한국교회가 “민족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독립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로마서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하였으며 또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한 일서 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이기에(요한일서 3:17)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 죄책을 고백한 것이다.

이러한 죄책고백과 함께 우리의 신앙도 새로워져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한반도를 맡겨주신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남과 북으로 나눌 수 없는 땅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땅을 우리는 세계의 이념적 대결로 그리고 민족간의 전쟁으로 나누어지고 말았으며 아직도 이 땅에서 가장 사악한 적으로 원수로 생각하여 총칼을 겨누고 있다. 그로 인하해서 남과 북은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생명죽임의 분단 속에서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의 신앙은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과 함께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의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둘로 나누어진 것을 하나되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정의평화를 분단된 한반도에서 이룩해 나가는 그것이며 이러한 신앙으로 세상을 섬기고 봉사해나가는 그것이다.

둘째, 이러한 죄책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또한 새롭게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분단이라고 하는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여야 한다. 세계 강대국들이 그어 놓은 민족의 분단과 남과 북의 전쟁을 통해 더욱 분단을 고착시켜버린 민족의 분단이라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언자 이사야가 본 메시아의 모습을 키가 크고 뚱뚱하며 화려하고 멋진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 무거운 짐을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사야 53장)인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에 억눌리고 짓눌려 작아져 버린 난장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꼭 같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한다.(빌립보 2:5-8) 이사야와 바울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겁디무거운 십자가를 지시다가 지시다가 그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작아져버린 난쟁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세계분단의 멍에와 죄악을 짊어지시다가 지시다가 그 무겁디무거운 십자가에 짓눌려 작아져버린 난쟁이가 되셔서 우리 한민족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곁에 함께 하신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평화통일의 신앙은 민족분단의 상황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 남과 북의 민중과 민족의 신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신음과 절규의 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한반도 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분단의 집자가를 함께 짊어지고서 하나님의 생명정의평화를 우리 한반도에서 이룩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밥상공동체 모습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집과 비유했고 먹고 마시는 것을 자주 말씀하셨으며, 자신이 친히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공급(요 2:1-11)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먹기를 탐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을 때(마가 2:16; 마태 11:19; 누가 7:34) 예수는 “잔치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금식할 수 있냐?”고 되묻는다.(마가 2:19)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는 변두리의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어울린다는 것, 즉 밥상공동체를 이룩하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는 밥상의 머리(주인)로서 함께 먹고 그리고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들을 따뜻하게 대접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 원수된 자들이 화해와 대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는 밥상머리의 주인(초대자)”으로 이해한다. 밥상공동체의 머리이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 곧 구원의 밥상을 차려주셨고 친히 우리들에게 그 밥상의 먹이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 

밥상공동체로서 교회란 그리스도를 평화의 종, 밥상공동체의 종으로서 고백하면서 민중의 밥의 정의를 위해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서 밥상공동체를 마련해야 한다. 밥상공동체로서 교회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남북 교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만나 먹고 마시고 화해하고 하나되는 밥상공동체를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밥상공동체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심지어 원수된 사람들까지도 모여서 사랑으로 만나고 먹고 마시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남북의 형제․자매들이 예수의 밥상공동체의 정신에 따라 밥상의 종이 되어 아시아의 밥의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밥의 정의를 위해서 밥상공동체를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 예수는 현존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구원의 예수, 평화통일의 예수를 만나는 것이요 그리고 그곳은 민족의 즐거움이요, 희망이요 평화통일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성찬식 밥상에 함께 앉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마실 때 그리스도를 평화의 종으로 고백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밥상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식구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날에 분단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져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화해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 중에 하나가 평화통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선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과 그 분단에 대한 죄책고백 함께 한반도의 평화통일을통해 세계에 평화로 봉사하고자 하는 신앙의 마음으로 지난해 여름학교에서 함께 작성한 고백기도를 다시 한번 더 고백해보자.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한반도의 평화와 생명과 정의의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분단의 아픔을 가진 남한과 북한의 평화와 화해를 원하시는 하나님, 세계사적으로는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냉전이 그쳤으나,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념을 넘어서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공의의 실천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를 받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며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의로운 한반도가 되게 하옵소서. 비록 남북관계와 국제정세가 경색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북한 주민을 위한 생명의 나눔과 사랑과 평화를 만드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아멘”

©WCC, 지난 WCC 10차 총회 기간 중 통일전망대를 방문한 WCC 총회 참가자들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리본을 달고 있다.


하율이 아빠 신학앎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의 증언 문서에 대한 해설(WCC와 종교다원주의)

2013.12.02 10:30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의 증언

해설: 한국일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주제의 배경

다종교사회현상은 20세기 중반부터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현상이다. 아시아 지역은 본래부터 다종교사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교사회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단일 기독교 문화와 전통을 조성한 사회였다. 또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의 경험은 타종교를 적대적 관계로 간주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불교나 힌두교 역시 19세기 식민지 경험을 통하여 기독교보다 열등한 종교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다른 종교가 유럽사회와 기독교에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중반의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었다. 이때부터 서구사회는 전통적 기독교 사회가 세속주의로 인해 붕괴되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과거 식민지 국가로부터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다종교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유럽 어디를 가든지 모스크를보는 것은어려운 일이아니며 시크성전이나 불교사원을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과 서구사회는 전통적 기독교사회에서 다종교사회로 전환하고 있다.


19세기의 “위대한 세기”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인들을 기독교인의 선교활동이나 개종의 대상으로 인식하였고 그들의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의 필요성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종교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살고 있다. 1991년 제1차 골프 전쟁이 후 세계는 종교간 대립과 갈등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세계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한스 큉(H. Kueng)이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가 오늘날 세계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역설적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간 평화가 수립되어야 하며, 종교간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간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한스 큉의 전제는 오늘의 세계종교현실을 간명하게 설명하는 테제가 되 었다.


이런 세계상황의 변화에서 기독교 선교는 다른 종교를 더 이상 선교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기존의 선교관이나 종교이해에 전환을 가져오도록 요청받고 있다. 또한 선교활동에서 증언과 함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적 이해처럼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대화가 기독교 증언을 대체하거나 약화시킨다는 우려는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물론 대화의 종류에 따라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대화도 존재하지만 모든 대화가 다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세계상황이 선교에 앞서서, 또는 선교를 위해 먼저 종교간 평화로운 공존이 전제되어야 하며, 기독교 선교 역시 종교간 평화를 구축하는 일과 무관하게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선교와 종교간의 대화의 관계에 대한 선교학적 정립이 필요하다.


2011년 WCC와 카톨릭 주교회의, 복음주의연맹의 세 교회가 함께 5년간 연구하여 발표한 문서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 증언: 행동을 위한 지침”은 위에서 언급한 세계현실을 반영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서로 만나기 어려운 세 교회가 그것도 매우 민감한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함께 논의한 것 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문서가 오늘 세계교 회가 다종교사회에서 직면하고 있으며, 기독교 선교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대안을 제시하였는가는 각 교회가 처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본 글에서는 먼저 문서가 제시한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 내용에 대한 평가와 함께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문서의 이해

1) 기독교증언을위한기초

문서는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 증언을 위한 기초로 7가지 항목을 제시한다.

1번은 기독교신앙의 증거태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에 대한 증언은 특권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종교적 우월감이나 공격적 태도나 배타적 자세가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함과 존경심으로 할 것을 말한다.

2-3번은 기독교 증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진술하면서 증언방식에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4번은 다종교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이웃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들을 향한 복음의 증언 안에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증언과 대화는 서로 상충하거나 상반되지 않음을 밝힌다.

5번은 상황에 따라 복음증거가 금지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당할 정도로 박해받는 곳이 있다. 그러나 복음증거는 박해상황에서도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계교회들이 연대적 관계를 형성하여 함께 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6번은 기독교 선교방식의 적합성과 적절성에 대한 진술이다. 때로는 선교활동이 가시적인 결과나 개종의 숫자에 비중을 두게 될때 과거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강제적 수단이나 물질을 사용한 회유와 같은 부적절한 방식을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은 증언하는 복음의 내용과 전하는 방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7번은 선교에서 회심사건이 중요한데 종종 회심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같이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회심은 전하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듣는 사람의 내적외적 환경과 과정을 통하여 은밀하게 일하는 성령에 속한 것임을 인정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회심을 기대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2) 원리들

문서는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 증언에 기초하여 선교를 수행할 때 12가지의 원리들을 따를 것을 권면한다.

1번은 기독교의 증거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사랑이야 말로 기독교 증거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랑 외에 교회의 자기중심적인 다른 요인들이 동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와 복음증거는 언제나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2번은 기독교 증거방식을 예수의 삶과 행동으로부터 본을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종종 복음서에 예수의 말씀은 강조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예수의 모습을 간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독교 증거의 모범인 예수의 삶과 행동이야 말로 모든 선교사와 복음증거자가 따라야 할 본이 된다.

4번은 기독교 증거활동과 선교 이해의 차이에 따라 오는 선교활동의 범위에 관한 진술이다. 신학적 차이에 따라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와 실천이 서로 다른 내용으로 분리되어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복음전도를 사회봉사보다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비하여 사회봉사가 소홀하거나 간과되는 경우도 있다. 또는 사회봉사가 있다고 해도 언제나 복음전도의 도구나 방법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에 따르면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는 분리되지 않는 선교의 다른 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6번은 기독교 역사에서 선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수용하거나 합법화한 적이 있다. 특히 타종교에 대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증거활동에서 어떤 유형이나 종류의 폭력도 거부할 것을 강조한다. 복음의 핵심이 사랑이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 안에서 증거해야 한다.

7번은 모든 선교활동은 종교적 자유를 존중하는 상황에서 진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때로는 종교가 정치나 인종, 문화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용되기도 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인권을 유린하는 사건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허용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분명한 거부의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

8번은 기독교 증거활동은 복음의 가치가 제시하는 정의, 평화, 공동선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며 협력할 것을 말한다. 기독교는 인류의 평화와 정의로운 삶과 같은 공동선을 위해 다른 종교들 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9번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진술로서 복음이 문화를 변혁하는 힘이 있지만 동시에 문화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복음이 더 풍부하게 이해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 문화적 상황 안에서 복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같은 복음을 들을지라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전통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교회들과 상호존중, 상호배움의 관계에서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10-11번은 기독교 증거활동에서 자신의 신앙을 전할 뿐 아니라 다른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증거에 대해서도 존중하면서 들을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증언은 대화를 포함하며 병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증거와 대화와 서로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상호보완적 관계를 갖고 있다. 증거의 결과로 종교를 바꾸는 개종사건은 당사자가 충분히 자유로운 양심의 상태에서 결단하도록 존중하고 기다려야 한다.

12번은 아홉째 기독교는 세상의 평화와 공동선을 위해 기꺼이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종교간 협력을 위한 상호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관계 형성을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2. 평가

1) 세계교회협의회, 카톨릭 교회 주교회의, 세계복음주의 연맹의 세 교회기관의 연합으로 작성된 본 문서의 의도나 방향성은 훌륭하다. 사실 세계교회협의회 안에서 신학적인 주제에 대한 일치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구나 뜨거운 감자와 같은 종교의 주제는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논의하거나 어떤 통일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 그런데 문서 작성에 참여한 세 교회 기구들은 서로 신학적 입 장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함께 5년간 연구한 끝에 본 문서를 완성하여 세계교회 앞에 발표한 노고를 치하한다. 그러면서 문서가 내포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


2) 기독교 증거활동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언급할 때 공격적이거나 배타적 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아직도 종교적 우월주 의가 선교의 동기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다른 종교나 종교인에 대하여 친절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다. 증거의 내용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하나님의 사랑인데 증거하는 태도나 방식은 그것과 상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현장에 대하여 갖는 문화적 우월주의, 종교적 우월주의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볼 수 있는 태도인데 종종 이런 태도를 선교의 열정과 혼돈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교 증거의 핵심 내용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증거하는 내용의 핵심일 뿐 아니라 그의 삶과 방식에 있어서도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씀을 주목하고 있지만, 그의 삶이나 증거방식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무어보다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작은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다면, 우 리는 세상에 존중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님의 선교 방식을 교회 선교의 모범으로 삼고 따르도록 연구할 필요가 있다.


4) 선교에서 가시적 업적이나 결과를 강조하려고 할 때 개종인의 숫자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정이나 업적주의적 선교에서 발생하는 것은 복음을 인격적 관계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수단과 방법이 적절하지 않음 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선교현장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인격적을 대하기 보다 선교의 대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문서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회심이나 개종은 선교과정에서 당연히 기대하는 바이지만 그것은 선교하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즉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고 보장된 상황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이 스스로 결단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5) 타종교인과 연대나 대화를 선교의 범주에서 말하고 있다. 보수적 입장에서 타종교인과 공존, 대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와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소수자로 존재하는 아시아 지역의 경우 다른 종교인들과 평화로운 공존, 대화는 일상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선교활동의 전제이다. 그러나 한국상황에서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종교인과 정의, 평화, 사랑의 실천과 같은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대화하며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위해 선교학적 근거가 좀더 분명히 제시되면 좋겠다.


6) 비판적 평가를 하면 본 문서는 무거운 주제를 단순하고 짧은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주제를 다룰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한 검토나 논의 를하지못하는 것이 한계라고 볼 수 있다.기독교의 증거에 대화가 포함된다는 진술은 타당하지만, 구체적으로 증거와 대화가 어떻게 나타나며 관계를 갖는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간 대화를 언급하였지만 대화는 일상적 대화,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는 대화, 진리의 대면을 위한 대화, 종교다원주의적 대화 등 여러 유형의 대화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대한 부정적 질문을 가진 사람에게 충분한 내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


7) 다른 종교간 만남과 대화, 협력은 필요하지만 선교활동에서 그것이 갖는 한계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각 종교가 서로를 존중한다는 점은 무시하거나 우월주의적 태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는 각 종교가 가진 특수한 요소나 내용들을 인정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간 대화가 단지 공통적 요인이나 유사한 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도 언급해야 하며 여기에서 진정으로 서로의 종교적 특성을 존중하는 일이 실현된다.


8) 또한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크가 진술한 바와 같이 각 사람 이 추구하는 진리가 보편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종교는 당연히 선교적 종교가 된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있다. 그럴때 각 종교들은 서로의 진리를 들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유도 허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진리의 대면이 발생하는데 결과는 문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에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WCC, 아사아 주제회의 때 아시아 문화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는 필리핀 공연팀 떼아뜨로 에큐메니칼



하율이 아빠 신학앎

다종교세계에서의 기독교의 증언(WCC 문서)

2013.10.23 17:08

다종교세계에서의 기독교의 증언

세계교회협의회/종교간 대화를 위한 주교회의/세계복음주의연맹


문서 소개 시작에 앞서서 몇 가지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본 문서는 교황청 종교간의 대화평화회의, 세계교회협의회, 세계복음주의연맹이 공동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예장통합에서도 같은 문서를 번역했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측에서 번역한 것이 좀더 매끄러워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본을 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표기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신교 표기로 바꿨습니다.

두번째 종교간의 대화를 배교로 보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러나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이 문서를 꼼꼼히 읽어 보시고 PCID, WCC, WEA가 종교통합을 추진하고 있는지, 배교를 하고 있는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서의 전반적은 흐름은 폭력과 경제적 우위를 내세워 선교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 문서입니다. 그리고 이 문서에 대한 해설을 담은 글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말

선교는 교회의 존재 자체에 속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세상에 증언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일입니다. 동시에 이 일은 반드시 모든 인간을 온전히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의 원리에 따라 하여야 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긴장이 있고 그리스도 증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인식하여,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PCID)와 세계교회협의회(WCC),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가 초대한 세계복음연맹(WEA)이 만나, 지난 5년 동안 성찰을 거듭하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증언에 관한 일련의 행동 권고로 쓰일 이 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서에서 우리는 선교에 관한 신학적 진술을 펼 의도는 없으며, 다종교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증언과 관련된 실천 문제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여러 교회와 교회 협의회 그리고 선교 단체들이 현재의 관행을 반성하도록 촉구하고, 적절한 곳에서는 이 문서의 권고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선교하는 고유 지침을 마련하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증언하는 그들 자신의 관행에 비추어 이 문서를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 증언의 기초

1.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온유하고 공손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특권이고 기쁨입니다(벧전3:15 참조).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증인이십니다(요18:37 참조).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언제나 그분의 증언에 동참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웃을 섬기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형태를 띱니다. 성부께서 성령의 힘으로 성자를 파견하셨듯이, 신자들도 말과 행동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라는 사명을 받아 파견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교회의 모범과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선교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눅4:16-20 참조)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4. 다원주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포함합니다(행17:22-28 참조).


5. 어떤 상황에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기가 힘들고 방해를 받거나 심지어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연대하여 끊임없이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합니다(마28:19-20; 막16:14-18; 눅24:44-48; 요20:21; 행1:8 참조).


6.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속임수나 강제적 수단과 같은 부당한 방식으로 선교를 수행한다면, 이는 복음을 저버리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탈은 참회를 요구하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끊임없는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롬3:24 참조).


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할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만 궁극적으로 회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요16:7-9; 행10:44-47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인간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로 부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3:8 참조).


원 칙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적절한 방식으로, 특히 종교 간 상황에서 완수하고자 할 때에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1. 하느님 사랑의 실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랑의 원천이심을 믿습니다. 따라서 그 증거로 사랑의 삶을 살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마22:34-40; 요14:15 참조).


2.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리고 특히 증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그분의 사랑을 나누고,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과 영예를 드리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요20:21-23 참조).


3. 그리스도인의 덕행. 그리스도인들은 정직, 사랑, 연민, 겸손으로 행동하고, 온갖 오만, 불손, 비방을 지양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갈5:22 참조).


4. 섬김과 정의의 실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롭게 행동하고 온유하게 사랑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미6:8 참조).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작은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부름 받습니다(마25:45 참조). 교육과 의료, 구호와 같은 섬김의 행위와 정의와 변호를 위한 활동은 복음 증언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봉사 활동을 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봉사 활동에서 금전적 보상과 사례를 비롯한 온갖 유혹을 삼가고 고발하여야 합니다.


5. 치유 봉사의 분별.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증언의 중요한 부분으로 치유 봉사를 합니다. 그들은 이 봉사 직무를 수행할 때 분별력을 발휘하여 인간 존엄을 온전히 존중하여야 하며, 사람들의 나약함과 치유 요구가 이용당하지 않도록 보장하여야 합니다.


6. 폭력 배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증언에서 권력 남용을 비롯한 온갖 형태의 폭력, 곧 심리적 또는 사회적 폭력까지도 배제하여야 합니다. 또한 예배 장소나 신성한 상징, 경전들에 대한 훼손이나 파괴를 포함하여 그 어떤 종교적, 세속적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 부당한 차별이나 억압도 배제하여야 합니다.


7. 종교와 신앙의 자유. 자신의 종교를 공공연히 고백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며 개종할 권리를 포함하는 종교 자유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데 근거한 인간의 존엄 자체에서 나옵니다(창1:26 참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집니다. 종교가 정치적 목적에서 도구화되는 곳이나 종교 박해가 자행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행태를 규탄하는 예언자적 증언을 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8. 상호 존중과 연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과 함께 서로 존중하며 협력하여 정의와 평화와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에 헌신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종교 간 협력은 이러한 노력의 핵심입니다.


9. 만민 존중.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문화들에 도전을 하면서도 이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이 문화의 어떤 측면에 문제를 제기할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복음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식별하여야 합니다.


10. 거짓 증언의 근절.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하고 정중하게 말하여야 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믿음과 실천을 배우고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이고, 그들 안에 있는 참되고 좋은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평가나 비판적인 접근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분명코 다른 종교에 관한 거짓 증언을 삼가야 합니다.


11. 개인의 식별 보장.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의 종교를 바꾸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는 가운데 적절한 성찰과 준비를 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결단의 행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2. 종교 간 관계 구축.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다른 종교인들과 신뢰와 존중의 관계를 쌓아 나가며, 더 깊은 상호 이해와 화해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협력을 증진하여야 합니다.



권 고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가 주최하고 세계복음연맹이 협력하여, 주요 그리스도 신앙 가족들(가톨릭 교회, 정교회,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 오순절 교회)이 참여한 제3차 협의회에서는, 초교파적 협력의 정신으로, 교회들과 국가나 지역의 교단들, 선교 단체들, 그리고 특별히 종교 간 상황에서 일하는 분들이 숙고해 보도록 이 문서를 마련하고,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1. 연구하십시오. 이 문서에 제시된 주제들을 연구하고, 적절한 곳에서는 개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증언에 관한 행동 지침을 마련하십시오. 이 행동 지침은 가능하다면, 다른 종교 대표들의 자문도 얻어, 초교파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2. 맺으십시오. 모든 종교인과 신뢰와 존중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특히 교회들과 다른 종교 공동체들 사이의 제도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 사명의 일부인 지속적인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십시오. 오랜 긴장과 갈등으로 공동체들 사이에 의혹이 깊어지고 신뢰를 잃어버린 특정 상황에서, 종교 간 대화는 갈등 해소와 정의 회복, 기억의 치유, 화해와 평화 구축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3. 격려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더 깊이 알고 이해하는 가운데, 다른 종교인들의 관점도 고려하면서, 자기 종교의 고유한 정체성과 신앙을 강화할 수 있도록 격려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그릇된 표현을 삼가야 합니다.


4. 협력하십시오. 다른 종교 공동체들과 더불어, 정의를 옹호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종교 간 활동에 협력하십시오. 가능하다면 갈등 상황에 있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십시오.


5. 요청하십시오. 많은 나라에서 종교 단체와 종교인들의 선교 활동이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종교 자유가 올바로 온전히 존중받도록 보장할 것을 그러한 나라들의 정부에 요청하십시오.


6.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우리의 존재와 활동의 핵심이자 그리스도 선교의 핵심임을 깨닫고, 이웃들과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WCC, WCC 중앙홀에서 종교간의 대화 문서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부록: 이 문서의 배경

1.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 협력이 계속 증진되고 있습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 간 대화와 협력 프로그램은 이러한 협력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과거에 협력한 주제들로는 종교 간 혼인(1994-1997년), 종교 간 기도(1997-1998년), 아프리카의 종교(2000-2004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이들의 공동 노력에서 나온 결실입니다.


2. 오늘날 세계는 폭력과 인명 피해를 포함하여 종교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그 밖의 다른 요인들이 이러한 긴장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간에 박해를 받거나 폭력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 이러한 갈등에 연루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 간 대화와 협력 프로그램은 그리스도인 증언에 관한 행동 권고를 함께 마련하는 공동 과정에 참여하여 관련 문제들을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 간 대화와 협력 프로그램은 이 과정에 세계복음연맹이 참여하도록 초대하였고, 세계복음연맹은 기쁘게 참여하였습니다.


3. 처음 두 차례의 협의회 회의가 열렸습니다. 첫 번째 모임은 2006년 5월 이탈리아의 라리아노에서 “현실 평가”라는 주제로, 여러 다른 종교의 대표들이 개종 문제에 관하여 견해와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이 협의회의 성명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이해하도록 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종교적 감성을 침해하면서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종교 자유는, 우리 자신의 믿음보다 다른 믿음을 존중하여야 하고, 우리 신앙의 우월성을 내세우려는 목적으로 결코 다른 종교를 폄하하거나 비방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하는, 타협할 수 없는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부과하고 있습니다.”


4. 두 번째 그리스도인 간 협의회 회의는 2007년 8월 프랑스 툴루즈에서 개최되어 같은 문제들을 성찰하였습니다. 곧, 가정과 공동체, 타인 존중, 경제, 시장과 경쟁, 폭력과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면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된 사목적, 선교적 문제들은 신학적 성찰의 바탕이 되고, 또 이 문서에 개진된 원리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각각의 문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들을 이 권고에 담았습니다.


5. 제3차 (그리스도인 간) 협의회 회의 참석자들은 2011년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만나 이 문서를 완성하였습니다.



©환경매일신문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8일(2012년 10월)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16회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에 참석해 7대 종단 대표들과 종교화합을 알리는 버튼식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 김주원 원불교 교정원장, 김희중 천주교 대주교, 최광식 장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홍재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최근덕 성균관 관장, 임운길 천도교 교령. 





하율이 아빠 신학앎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교회의 소명(WCC 문서)

2013.09.10 00:28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교회의 소명

An Ecumenical Call to Just Peace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눅1:79)

주제성찰: 평화


1. 문서의 배경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된 요청이다. 이 요청은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의 결의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졌고,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와 평화를 향한 교회의 모색”(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0: Churches Seeking Reconcliation and Peace)을 통하여 드러난 평화에 대한 입장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2011년 5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주제로 열리는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의를 기점으로 새롭게 솟아오를 평화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들과 함께 앞으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정의와 평화에 대한 새로운 일치에 도달하는데 이 문서들이 일조하기를 소망한다.


IEPC에 참가한 청년들이 경제정의를 호소하는 스킷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2. 문서의 내용(요약)

1) 성서의 가르침

성서는 정의와 평화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사 32:17; 약 3:18) 이 두 가지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 바르고 지속되어야 할 관계성과 우리가 지구와 맺고 있는 생생한 연결성, 그리고 창조세계의 조화와 보존을 가르치고 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만 상처입은 오늘의 세계에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약속과 선물—내일의 소망이며 지금 여기에서 선물이 되는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


2) 교회의 증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평화를 이루는 자리가 되는 소명을 갖고 있다. 특별히 다양한 방식의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의 예전적인 전통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는 방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사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의 교회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끊임없이 새롭게 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오직 하나님의 평화를 기초로 삼을 때 모든 믿음의 공동체들은 “지구적 차원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 속에서만 아니라 각자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화해와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다.(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평화를 살아내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스스로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산 위에 세워진 동네(마 5:14)로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맡기신 화해의 사역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준다.(고후 5:18)


3)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심각한 폭력과 인권유린, 그리고 창조질서의 파괴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만일 모든 곳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이 세계 안에 고요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전쟁의 소문으로 동요하고 있으며, 민족적 종교적 적개심과 인종과 계급의 차별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으며,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남아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추방당하고, 집과 재산을 잃고, 자기 나라 안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이러한 갈등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많은 여인들이 성폭행과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다. 여러나라에서 국민들은 군대와 민병대, 게릴라들, 범죄조직 혹은 정부군에 의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안보와 군사력 증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부에 의하여 고통당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권력을 가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한편에서 매일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있다.


4) 정의로운 평화의 길

정의로운 평화는 우리 모두에게 삶으로 증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평화를 성취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인종과 계급, 성별과 문화, 종교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폭력을 포함한 개인적이고 구조적이며 대중적인 폭력들을 방지하고 제거해야 한다. 정의로운 평화의 길에서 비폭력 저항은 중심적인 요소이다. 잘 조직된 평화적인 저항은 정부의 억압과 학대, 혹은 취약한 사람들과 자연을 착취하는 경제활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한다. 정의로운 평화는 “정의로운 전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며, 불의한 무력사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욱 적극적인 실천이다. 침묵의 무기에 더하여 사회정의와 법치주의, 인권존중과 사회안전망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포함한다.

5) 정의로운 평화의 여정을 살아가기

정의로운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 1:79) 것을 믿으며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우리는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 적극적인 비폭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 온유함과 자비를 포함하는 평화의 윤리와 실천을 공유하며 여행하는 동반자들이다. 이웃들과 함께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움켜쥐고 사는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큰 관용과 개방의 삶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있는 약함을 보고, 공통의 인성을 확인하면서 힘을 얻는다. 이웃은 더 이상 수상한 사람이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여정과 길을 함께 해야 할 인간 동료이다.


6) 정의로운 평화의 길에 선 이정표들

갈등의 변화는 평화를 만드는 여정에서 근본적인 부분이다. 변화의 과정은 가시적인 희생자들과 공동체들을 만들어내는 폭력의 정체를 드러내고 숨겨진 갈등을 폭로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갈등의 변화는 대적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갈등의 증폭으로 향하는 관심을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갈등의 상황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실패의 신호이며 정의로운 평화의 길에 나타난 새로운 장애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만들고 세워가는 사고와 행동, 그리고 법적인 연합의 자리로 함께 나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폭력적인 갈등의 변화를 실천하며 평화의 과정으로 공동체를 인도하는 새로운 윤리적 담론을 수용해야 한다.


7) 정의로운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

성서는 우리에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존엄성과 권리를 은혜로 받았다고 가르쳐 준다. 이러한 존엄성과 권리를 인식하는 것은 정의로운 평화를 이해하는 중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여 인권을 수호하고 국제적인 법치주의의 강화를 추구하는 모든 시민 사회의 동지들과 우호와 협력 속에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신앙 전통과 신념, 그리고 세계관을 가진 이웃들과 협력하여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헌신 속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폭력을 거부하고, 가난하고 눌린 자들을 위하여 정의를 세우라 하신 복음의 명령에 응답하는 길을 찾고 있다.(마 5:1- 11, 눅 4:18)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편견에 가담하고 적대감을 확대시키는 태도에 편승했던 그리스도교회의 공모를 인식하면서, 우리의 공동체들을 화해와 수용,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는 일에 헌신한다. 평화의 비전을 가진 교육은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다.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개인들의 영적인 성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평화교육은 우리 안에 평화의 정신을 고양하고, 인권에 대한 존중을 함양하며, 폭력을 대치하는 길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평화교육은 상이한 여러 전통과 문화들 속에 있는 관습과 가치들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동력으로서 적극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한다. 인성과 양심에 대한 교육은 사람들이 평화를 추구하고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한다.


8) 정의로운 평화의 공동적 추구와 성취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순례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공동체들을 세우는 많은 기회들을 제시한다. 어떤 교회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며, 재물을 윤리적으로 사용하고, 환경을 돌보며,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 교회는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회들이 연합하여 평화를 위하여 일할 때, 그들의 증언은 세상에서 보다 많은 믿음을 얻을 것이다.(요 17:21)


9)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 그러므로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미 4:4)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이니냐?”,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미 6:8, 눅 10:27, 마 5:44) 너무나 많은 공동체들이 경제적 계급과 인종, 피부색과 신분, 종교와 성별로 인하여 분열되어 있다. 교회가 평화를 만드는 일꾼이 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평화를 위한 실천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자들은 반드시 교회 생활 속에 있는 폭력에 대한 침묵의 문화를 깨뜨리는 일에 참여하고, 우리의 공동체들 안에 있는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습관화된 분열을 극복하는 일에 연합해야 한다.


10) 지구의 평화를 위하여 – 그러므로 생명이 유지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케 하셨으며, 인류의 자손들에게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창조 질서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명과 정의와 사랑의 청지기로 일하는 것이다.(창 2:1-3, 요 10:10,

롬 8:20-22)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인 창조세계를 돌보고 생태계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정의로운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교회와 세계를 교구로 살아가는 교인들은 반드시 자기비판적인 입장에서 환경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전체로서 지구의 올바른 지속을 지원하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11) 시장의 평화를 위하여 – 그러므로 모두가 존엄성을 가지고 살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다른 생물들이 끝없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자원을 허락하신 놀랍게 창조하시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이 계급과 성별, 종교와 인종 혹은 국적에 관계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풍성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시 24:1; 145:15; 사 65:17-23) 시장의 평화는 “생명의 경제”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적절한 경제사회적 관계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존중,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지속가능한 사용,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건강하고 충분한 식량, 그리고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 다수의 사람들이참여하는 것이 토대이다. 교회는 뜻을 같이 하는 사회단체들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의 완전한 성취를 위하여 반드시 노력해야 한다.


12)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보호되었더라

우리는 생명의 주시는 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생명을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원수를 사랑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등하게 판단하고, 나라들은 공공의 장에서 진리를 따라야 할 책임이 있으며, 무기를 쳐서 농기구를 만들고, 더 이상 전쟁하는 법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출 20:17, 사 2:1-4, 마 5:44) 우리는 생명과 그 기반이 되는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신장된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가 함께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넘어선 이러한 위협의 강도는 전례없는 지구적 차원의 공동대응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강도를 지닌 두 가지 위협, 즉 핵무기에 의한 대량살상과 기후변화는 생태계의 많은 부분과 정의로운 평화 운동의 모든 발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또 다른 위협은 생태계의 멸종을 가져오는 생활방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는 국제적인 연대투쟁은 아직 미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교회들은 신앙 전통을 가진 공동체들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신뢰와 협력을 이루고, 국가 간의 전쟁을 억제하고 인류와 지구를 전례없는 위험에 빠트리는 무기들을 제거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불법성을 드러내야 한다.


3. 문서의 성찰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올해로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한다. 여전히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 이산가족은 이별의 고통을 간직한 채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은 미비하다. 해마다 남과 북에서는 거대한 국방비가 지출되고 있다. 평화통일 없는 한반도는 불신과 폭력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북한의 핵무기 때문에 초긴장 상태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언젠가 인류가 전쟁을 종식시키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평화통일은 우리의 권리이다. 북한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단의 벽을 넘어 만나야 한다.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가 내딛는 평화의 발걸음이 남과 북의 평화통일 없이는 정의로운 평화의 발걸음이 될 수 없다. 발 한 짝만 내딛으면 닿을 수 있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면 UN 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비극적인 일인가! 언제쯤 우리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춤을 추게 될까? 언제쯤 우리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주님이 베푸신 상에 함께 앉아 먹고 마시는 일이 가능할까?


WCC 제10차 부산총회 준비위원회 문서에 의하면 북한을 초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북한이 부디 참석하여 평화의 발걸음을 함께 내딛길 소망한다. 평화통일 없는 남과 북의 사람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일 뿐이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비추듯이 평화의 해가 한반도에 비추어 남과 북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길 바란다.(눅 1:78-79)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부산 벡스코에서 WCC 제10차 총회가 열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이다. 얼어 붙은 남과 북의 발걸음은 이제 장벽을 넘어 평화를 향해 함께 손을 잡고 이야기하며 걸어가야 한다. 평화의 축제가 열리는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개최하는 한국교회는 일치를 추구하며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존중되는 정의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날이 반드시 오게 해야 한다. 또한 남과 북이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를 받아들이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제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통해 향후 분열되었던 한국교회 예장 통합이 화해를 시도하며 한국교회 교파간의 대화를 통해서 상호이해와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WCC 제10차 부산총회 이후에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면 여름캠프도 개교회, 지역교회 중심이 아닌 오이코스 신학운동처럼 지역과 교파를 뛰어넘어 연대하여 평화교육을 담은 생명평화캠프를 개최하며 평화의 인물을 길러내는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하율이 아빠 신학앎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 지형 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WCC 문서)

2013.09.05 00:15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 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
A new WCC Affrimation on Mission and Evangelism

주제성찰: 선교


1. 문서의 배경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2006년 포르토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이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확언을 채택하기 위해 수고하며 공헌하였다.이 새로운 성명서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 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된 이후 선교와 전도에 대해 WCC가 발표한 공식성명서는 1982년에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선교성명서는 2012년 9월 5일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성명서는 지난 30년간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에큐메니칼 통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선교와 전도"가 기독론 중심이었다면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틀 안에서 성령의 선교와 생명을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복음의 우주적 범위, 선교와 전도의 중심축의 이동, 신자유주의 맘몬 숭배에 대한 대응, 복음과 종교간 대화의 문제"등은 이번문서에서 새롭게 추가된 내용들이다.


이 성명서는 WCC 회원교회들과 그 협력선교기구들을 너머 더 광범위하게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물을 위한 생명의 풍요를 향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문서의 내용 (요약)

1) 제1-11항은 "함께 생명을 향하여"라는 새로운 확언의 주제소개와 질문을 담고 있다. 이 영역에서 창조세계보전과 생명,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적 성령이라는 핵심개념을 토대로 생명, 변혁적 영성, 기독교 지형변화, 중심과 주변, 시장경제, 종교와 문화, 교회 갱신 등의 선교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2)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12-35항) 이란 본론의 첫 번째 부분으로 성령의 선교, 선교와 피조물(창조세계)의 번성, 영적인 은사와 영분별, 변혁적 영성을 다루고 있다.


성령의 선교를 언급하는 이 영역에서 창조세계보전과 생명,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성령은 삼위일체론의 틀 안에서 창조의 영, 창조보전과 지탱의영, 생명을 부여하시고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피조물 가운데 성령의 경륜의 보편성과 성령의 구속 사역의 특수성은 둘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성령의 선교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인간 구원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의 번성을 선교에 포함한다. "모든 피조생명체와 우리들과의 화해된 관계성을 표현하는 선교 유형", "피조세계와 우리의 몸은 둘 다 성령의은혜로 변화될 것", "모든 피조물과 친교", "자연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를 확언" 등의 표현은 인간 이외의 피조물이 멸망하는 생태 위기의 시대에 인간 구원이 생태 정의와 상호관련성이 있으며, 참된 인간 구원은 "땅위의 모든 생명의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성"형성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한다.


영적인 은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온 피조물의 화해"를 위해 주셨으며. 영분별이란 억압된 사람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피조물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고, 모든 차원에서 생명의 충만함이 고양되는 곳에 성령이 임재한다. 동시에 죽음의 세력과 생명파괴는 악령의 일이다. 이와같이 교회 밖에서 성령의 임재와 악령의 현존을 분별하는 영분별이 있어야 한다. 변혁적 영성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자체변혁과 선교적 존재로의 변혁을 일으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힘의 오용과 부당한 권력남용"의 회개를 요청하기에 개인 구원이나 성화의 차원만 아니라 정의, 평화, 화해, 치유의 차원을 가진다.


3) 해방의 영: 주변부로부터의 선교(36- 54항)는 왜 주변부 사람이며 주변화인가,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치유와 온전성 으로서의 선교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께서 주변화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이유는 주변화된 사람들의 상황이 세상의 죄악을 입증하고, 생명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땅의 가치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중심'이라 한다면 그들은 선교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선교는 이러한 '중심'과 결별하고 '중심의 부정의'에 저항해야 한다. 동시에 주변부 사람들의 '중심'으로의 이동이 선교는 아니고 주변에 있으면서 부정의한 권력구조를 변혁시켜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선교는 투쟁과 저항과 해방으로서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와 창조세계 안에 구체적 실재와 상황들 속에서 행동하시고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해 온 땅의 생명 충만을 추구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가부장적 이념을 해체하고, 원주민들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인종차별과 카스트제도의 사회적 정착에 도전하는 것을 수반한다." 선교하는 교회는 반지배문화공동체로서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되도록 헌신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치유와 온전성을 추구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4)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55- 79항)는 하나님 선교와 교회의 생명, 하나님 선교와 교회 일치, 교회에 선교하는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 지역교회: 새로운 주도자를 언급한다.


교회와 선교는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에서 기원한 점, 공동의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상호 불가분리의 실재다.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성령 안에서 교회의 다양성은 선교의 다양성과 연결된다. 동시에 한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로서 통일성을 나타내며, 공동의 증언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정의를 찾으라는 성경적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선교의 힘과 능력은 창조와 역사 속에 현존하고 역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환대는 주인-손님의 이중구조 개념을 극복하도록 요청한다. 성령의 안에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상황에 있는 선교는 겸손과 상호성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에 창조적으로 부응하는 교회 모델들을 개발하면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


5) 오순절의 영: 만유를 위한 복음(80- 100항)이란 제목으로 그 소 주제들은 전도의 소명,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전도하기, 전도,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인의 현존, 전도와 문화를 담고 있다.


이 영역의 본문은 예배, 증언, 봉사, 친교, 전도의 통전적 선교라는 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하는 것을 포함해서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전도'의 소명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가 공동체들을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종교적 정체성들과 신념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맥락에서의 개종은 아니다.


전도는 문화와 종교에 현존하는 성령의 인도 하에 "말과 행동으로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 복음의 성육화, 겸손과 존중의 대화, 공동선을 위한 협력, "악과 부정의에 대항하는 예언자적 사명"이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복음의 성육화를 위해 복음의 문화에 대한 도전, 승인, 변혁을 성령의 인도로 분별하며 생명공동체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생명의 잔치: 결론적 확언"으로 결론적 개관을 하고, 본론에서 다룬 내용을 압축하여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결론을 도출하고, "종말론적인 목적을 향하여 만유를 초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고백으로" 최종 결론을 맺는다.


선교는 생명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다. 이 잔치는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창조와 풍작에 대한 축제"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선교로 실현된다고 한다.


(1) 우리는 하나님 선교의 목적은 생명의 충만함이며, 그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2) 우리는 선교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부터 시작되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재창조 가운데 지속됨을 확언한다.
(3) 우리는 영성이 선교적 활동력의 근원이며 성령 안에서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한다.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이 선교의 본질이며, 개인의 거룩과 성화 중심의 영성을 넘어 온 세상의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선교영성이어야 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가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인간구원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상호연결망을 가지는 우주적 차원의 선교이다.
(5) 우리는 오늘날 다방향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선교 운동이 남반구와 동양으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확언한다. "미전도 지역", 땅 끝까지 이르는 지리적 확장 선교 개념으로부터 세계 기독교의 일치와 협력 가운데 선교 신학과 의제와 실천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6) 우리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선교의 대리자이며 선교를 만물의 생명의 충만함으로 이해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다고 확언한다. 힘을 가진 중심으로부터 주변부로 향하는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로 전환한다.
(7)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기초해 있으며, 변혁적 선교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우상숭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성장, 업적, 승리를 중시하는 시장 경제적 가치에 편승하는 선교에서 경제와 생태 정의를 실현하는 대안적 선교로 나아간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성령 안에서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와 선전활동식의 선교를 극복하고 언행일치 속의 사랑과 정의 실현의 선교를 한다.
(9)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서 필수적이라고 확언한다. 배타적, 자문화 중심적, 승리주의적 선교에서 대화와 소통이 있는 선교,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위한 선교를 한다.
(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며 권능을 주심을 확언한다. 모이는 교회 중심 선교에서 이를 포함하여 교회 갱신과 세상 속의 새 생명 공동체 형성의 통전적 선교를 지향한다.



3. 문서의 성찰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영향과 성찰할 점을 주고 있다.


1) 선교이해와 신학적 지평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혼구원', '인간중심', '구속신학중심'의 선교에서 삼위일체적 선교와 인간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을 포함한 우주적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선교에 임하도록 도전받을 것이다.


2) "소외된 자들이 주체적 참여자가 되는 선교"여야 하는 "예언자적 선교신학"으로의 전환을 도전받을 것이다. 주변인들이 예언자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의, 연대, 포용성의 선교에 도전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개 교회나 선교단체의 이름과 업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관행을 깨어야 한다. '단기선교'는 '선교여행', 지역의 교회를 무시하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간의 진정한 파트너십을 돕는 일치와 연합의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3) 영성을 선교의 중요한 본질적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추구해야 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로 거듭나는데 도전이 된다. 한국교회 선교가 개 교회주의와 물량주의, 업적주의의 비본질적인 선교 행태에서 과감하게 탈피하는 데 도전을 받을 수 있다.


4) 하나님의 선교와 복음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안에서 교회가 배타적이며, 적대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겸손과 존중과 환대의 선교로의 전환을 도전받을 것이다, 그리고 다문화 · 다종교 상황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복음의 '공동의 증언'을 하는 '선교하는 교회'임을 인식"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5) 교회론의 근원적인 이해를 모색할 수 있다. 교회는 '승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의 참여자이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선교적 차원과 의미를 넓힐 수 있다. 예배를 폐쇄적 종교 의식이나 교회 내적 행사의 의례적 순서가 아니라 온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재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복음의 내용과 복음 전도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참된 전도는 "권력과 부와 소비주의, 그리고 이와 유사한 생명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대항하는 것이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적 소명"을 이루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는 우리에게는 교회세습과 비리문제 뿐만 아니라 성정의, 경제정의, 생태정의, 전쟁과 평화, 핵문제, 다문화와 같이 풀어내야할 과제들이 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우주적 차원에서 온 생명들을 선교의 동반자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율이 아빠 신학앎

하나님의 선물과 일치로의 부르심, 그리고 우리의 헌신(WCC 문서)

2013.09.04 10:30

하나님의 선물과 일치로의 부르심, 그리고 우리의 헌신

God's Gift and Call to Unity - and Our Commitment

주제성찰: 일치


1. 창조세계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창조세계의 다양성 안에 깃든 그 생명력을 찬미하며, 창조세계의 선함 (창세기 1장)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따라서 변혁시키시는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화해하게 된 온 창조세계가 일치와 평화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에베소서 1장)


우리의 경험

2. 오늘날, 온 창조세계, 즉 이 세상과 거기 거하는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희망과 극도의 절망, 그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인간 문화의 다채로움으로 인해, 지식과 발견으로 말미암은 경이로움으로 인해, 공동체들이 재건되고 적대적 관계에 있던 자들이 화해함으로 인해, 그리고 사람들이 치유 받고 배를 채울 수 있게 됨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이 모든 것들은 희망과 새로운 시작의 징조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울부짖고 있는 자리가 있음에 또한 애통함을 느낀다. 사회적 · 경제적 불의, 가난과 기근, 탐욕과 전쟁으로 우리 사는 세상은 황폐하게 되었다. 폭력과 테러리즘과 전쟁, 특히 핵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HIV/AIDS와 그 밖의 다른 전염병들로 인해 고통 받고 있으며, 고향에서 쫓겨나고 땅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숱한 여성들이 폭력과 불평등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남성들 중에서도 학대당하는 이들이 있다. 사회 주변부로 쫓겨나고 배제된 사람들도 있다.우리는누구나할것없이우리의 문화로부터 소외되고 이 땅과 단절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창조세계는 오용되어 왔으며,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균형에대한 위협과 점증하는 생태적 위기 그리고 기후변화로 말미암은 결과에 직면해 있다. 이것들은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이웃, 그리고 우리와 창조세계와의 관계가 뒤틀려 버렸다는 징조들이며,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축제와 슬픔 사이에서 그 비슷한 긴장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 도처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새롭고도 전에 없던 다양성을 갖추며 성장해 나감에 있어 활력 넘치는 생명력과 창조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교회들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라 부르셨음에 대한 자각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교회가 고통과 계속되는 박해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는 곳에서,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며 연대함은 하나님 주신 은총의 또 하나의 표지라 할 수 있다. 그간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치가 증대될 수 있는 모판을 만들어 줌으로써 새로운 사귐을 장려해 왔다.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현지 공동체 안에서, 또 지역적 차원에서 새로이 합의된 약속 및 보다 긴밀한 협조 안에서 더불어 일하면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나누고 배움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아름답지만 한편 상처 받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보존하기 위해 함께 일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점점 더 깨달아 가고 있다. 이렇게 심화되는 관계들은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

4. 그러나 다양성이 분열로 변질되고,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시종일관 인지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상황도 경험하고 있음을 우리는 슬프게 생각한다. 우리는 성찬의 교제 식탁주위에 다 함께 모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남아 있는가 하면, 새로운 문제들이 날카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키며 교회 안과 교회 사이에서 새로운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사리 각자의 전통과 공동체 안으로 움츠러 들어감으로써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선물에 의해 도전받지도, 풍성해지지도 못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이라는 창조적이고도 새로운 삶 안에 일치에의 열정, 혹은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로 인해 우리는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 일어나는불의와 심지어 갈등마저 보다 쉽게 묵인하게 된다. 사람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정에서 조금씩 지치고 실망함에 따라 우리는 주춤하고 있다.


5. 우리는 인간의 약점을 지닌 자들로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항상 영광을 돌리지는 않는다. 사람들을 배제시키거나 주변화시키고, 정의를 추구하기를 거부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꺼리고, 일치를 추구하지 않으며, 창조세계를 착취함으로써 생명을 학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선물을 거부하는 셈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성서적 비전

6. 우리가함께성서를읽을때,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자리, 즉 교회를 이해하는 눈이 열린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 및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생명을 돌보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창세기 1:27-28)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개함에 있어 결정적인 하나의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자들과 버려진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뭇 민족의 빛이 되라고 불렀다. (미가 6:8, 이사야 49:6)


7.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분리와 증오의 장벽을 허무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으며, 자신의 몸 안에서 참다운 일치와 화해를 이루셨다. (에베소서 1:9-10, 2:14-16)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셨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마태복음 9:35-36, 누가복음 4:14-24) 자신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그리고 성령의 힘을 통해, 예수께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교제를 밝히 드러내셨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사랑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요한1서 1:1-3)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 그의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20- 24) 예수께서는 일치와 화해라는 자신의 메시지와 사역을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교회에 위임하심으로써, 맡은 바 그 분의 사명이 계속 이어지도록 교회를 부르셨다. (고린도후서 5:18-20)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시작부터 더불어 살았으며, 함께 빵을 떼고 기도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복음을 선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불화나 분열과 맞서 싸우면서 사도적 가르침과 친교에 전념했다.(사도행전 2:42, 사도행전 15장)


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 되게 하시고, 화해시키시며, 세상에 대해 자신을 희생한 그 사랑을 체현하고 있다. 친히 연합하시는 하나님의 삶, 그 중심에는 십자가도 영원하며 부활도 영원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드러난 하나의 실재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을 기도하며 간절히 기다린다. (로마서 8:19-21)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보다 앞서 계시며,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시며, 우리의 허다한 잘못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오늘날 일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9. 에큐메니칼의 여정에 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 온 창조세계의 일치를 위해 섬기게 하신 것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소명은 다음과 같은데, 그것은 새 창조의 전조(前兆)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게 주고자 하시는 생명을 전 세계에 알리는 예언자적 표지가 되는 것이며,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10. 새 창조의 전조로서의 교회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은혜가 넘치는 선물을 주신다. 그것은 성서에 기초한 신앙(faith)이고, 성령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세례(baptism)이며, 하나님과 우리 서로 간의 교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자, 사귐을 증대시켜 이를 통해 우리를 선교로 파송하게 하는 성찬(Eucharist)이고, 모든 믿는 자들의 은사를 찾아내 키우고 또한 교회의 선교를 이끄는 사도적 목회(apostolic ministry)이다. 회합적이고 협의체적 모임들 역시도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선물이다.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이 모임들은 서로의 필요와 세상의 필요를 채우면서 무엇을 합의할 것인지 분별하고, 함께 가르치며, 희생적으로 살 수 있게한다. 교회의 일치는 획일성과 다르다. 다양성 역시 창조적이고 활력을 불어넣는 선물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사람들이 서로 이방인이나 적이 되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하나 되게 하시는 실체에 해를 가해도 좋을 만큼 다양성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은 결코 아니다.1


11. 예언자적 표지로서의 교회에 주어진 소명은 하나님께서 온 창조세계에 뜻하고 계시는 생명을 공표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교회의 분열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좀처럼 신뢰할 수 있는 표지라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민족성, 인종, 성, 장애, 권력, 사회적 지위, 그리고 신분에 기반한 분열이나 주변부화 역시 일치에 대한 교회의 증언을 무색케 한다. 신뢰할 수 있는 표지가 되려면,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인내, 겸손, 관대함, 상대방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상호 책임, 포용성, 그리고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고린도전서 12:21)라고 말하지않고 기꺼이 함께 하려는 의지 등의 자질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정의를 세우고, 평화 속에 함께 살며, 저항과 수고를 침묵시키는 안이한 평화에 결코 안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와 더불어 도래하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 싸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화해되고 새로워질 때라야 교회는 모든 사람들과 온 창조세계가 화해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진정 증언할 수 있게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참된 표지이자 신비인 때는 다름 아닌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것처럼 때론 고난 받으며 약하고 가난한 바로 그 때이다. 2


12. 봉사자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생명을 긍정하는 계획을 나타내 보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교회의 가장 기본적 본성은 선교이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 안에서 온 인류와 온 창조세계에 주시려 작정한 교제라는 선물을 증거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고 또한 보내심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섬기고 전도하며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세계에 제공하는 일에 참여한다. 성령의 권능안에서교회는다른상황과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속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따라서가능한모든곳에서모든사람들및 창조세계의 안녕을 위해 협력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13. 교회의 일치, 인간 공동체의 일치, 그리고 온 창조세계의 일치는 하나다. 그것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의 일치는 정의와 평화의 삶을 요구하는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하지 않을수없게된다.3


우리의 헌신

14.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교회의 자리를 확신하는 바이며, 우리의 분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증거가 약화됨은 물론,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원하시는 그 일치에 대한 증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음을 비통한 마음으로 고백하면서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교회 사이의 분열을 회개한다. 우리는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창조세계를 지탱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일치로 부르신다. 우리는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공급하고 계시는 새로운 생명의 전조, 신뢰할 수 있는 표지, 그리고 유능한 봉사자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갈망한다. 일치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열정이 새로워지는 때는 바로 우리가 생명의 모든 충만함으로 우리를 손짓하여 부르시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이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들의 친교의 기본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배와공동의삶안에표현된,또한세상에 대한 증언과 봉사를 통해 표현된,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성례전적 친교 안에 있는 가시적 일치로 서로 부르고, 또한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그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4에 계속 헌신하기를 서로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16. 이와 같은 공동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한 식탁에 둘러앉아 우리의 일치를 표현할 때, 우리는 함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그리고 사도적 교회'라는 완전한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일치를 추구함에 있어 우리는 다른 전통들이 가진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개방할 것이며, 아울러 우리 전통이 가진 선물 또한 그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새로운 목소리와 다른 접근 방법론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이며,함께현대의사회적·경제적· 도덕적 문제들이 제기하는 복잡한 도전들을 다루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보다 공정하고 참여적이며 포용적으로 함께 사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신앙의 공동체들과 함께 인류의 안녕과 창조세계의 안녕을 위해 협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바로 그 일치(요한복음 17장)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가져다주신 믿음과 사랑과 열정의 일치, 예수께서 아버지와 서로 나누신 것과 같은 일치,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교제 안에 내포된 바로그 일치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선교와봉사안에있는일치를위한 교회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17.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린다.


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그리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희망을발견할수있도록, 상처입은세계가 치유받을수있도록, 그리고갈라진교회가 하나되는 것이 우리 눈에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분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한몸인 그분안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당신과 당신의 성령과 함께, 찬양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한 하나님, 이제와 그리고 영원히, 아멘.






  1. 1) 우리는 교회들이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문서, “교회: 공동의 비전을 향하여”(The Church: Towards a Common Vision)에 응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 살도록 요청하시는 가시적 일치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길 기도한다.
  2. 2) 우리는 WCC의 많은 프로그램들이 민족성, 인종, 성, 권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분열에 맞서 싸우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앙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에 고마움을 표한다.
  3. 3) 우리는 ‘폭력극복 10년운동’(Decade to Overcome Violence, DOV)을 통해 자메이카 평화대회가 채택한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교회의 소명’(An Ecumenical Call to Just Peace)에 요약된 하나님의 방법으로서의 정의로운 평화에 대해 배운 모든 것에 감사한다. 또한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의 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에 요약된, 하나님의 방법으로서의 선교에 대해 배운 모든 것에도 감사를 표한다.
  4. 4) 2006년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제9차 총회에 의해 개정된 WCC의 헌장과 규칙 제III항, 목적과 기능 중에서. 우리는 1948년에 열린 제1차 WCC 총회에서 나온 말을 기억한다. “여기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창립하기로 서로 서약하였다. 우리는 함께 하려 한다(We intend to stay together).”


하율이 아빠 신학앎

모두의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경제: 행동촉구의 부름(WCC 문서)

2013.08.31 01:30

모두의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경제: 행동촉구의 부름

Economy of Life, Justice and Peace for all: A Call to Action

주제성찰: 정의


1. 문서의 배경


이 문서는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제9차 총회가 폐막하면서 AGAPE 과정의 후속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의한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AGAPE는 인간과 생태를 중시하는 대안적 지구화(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Earth)의 약어이다.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는 AGAPE 문서를 중심으로 지구 차원에서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AGAPE 과정을 종결하지 말고 이를 계속할 것을 촉구하는 "AGAPE - A call to love and action"이라는 문서를 채택했다.이렇게 해서 추진되기 시작한 AGAPE 과정의 후속작업은 WCC가 주도한 PWE 프로그램의 틀에서 진행됐다. PWE 프로그램은 가난(poverty)과 부(wealth)와 생태계(ecology)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면서 가난을 척결하고, 부의 축적에 도전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PWE 프로그램은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영역의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지속적인 대화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고, 대륙별로 조직된 연구 모임과 협의회들을 통하여 전개 되었다. 그리하여 2007년 탄자니아 다레쌀람에서 아프리카 협의회, 2008년 과테말라에서 라틴아메리카 - 카리브 협의회, 2009년 치앙마이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협의회, 2011년 캘거리에서 북미 협의회가 순차적으로 열렸고, 2012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는 AGAPE 과정을 기리는 지구 포럼이 열렸다. '모두의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경제: 행동촉구의 부름'은 이와 같은 협의 과정을 거쳐 2012년 크레타 중앙위원회에서 채택된 공식문서이다.


2. 문서의 내용(요약)


1) 서언이 문서는 경제의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고, 세계적 금융위기, 사회경제적 위기, 생태위기, 기후위기 등이 중첩되면서 인간과 생태는 심각한 위험상태로 들어가고 있다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이기주의, 민감하지 못한 외면, 이 모든 위기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의 죄악을 우리가 차단하지 않으면 지구 종말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문서는 교회에 행동하도록 촉구 하면서, '생명의 경제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금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반에 하나님의 정의가 자리하고 있다'며 희망을 갖자고 권유한다.


2) 생명의 신학적 · 영적 확언문서는 생명을 살리는 일과 관련해서 일곱 가지 명제들을 제시한다. 먼저 우리의 성경적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넓은 생명 망의 일부분으로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셨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받은 생명을 다시 땅에게 주고, 하나님집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지속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 공동체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집의 경제는 모두를 위해 풍성한 생명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에서 시작한다. 문서는 이와 같은 성서의 생명 이해가 세계 여러 지역 원주민들의 생명에 대한 지혜와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다.


문서는 "좋은 삶"이 상호성, 서로 나누는 동반자 정신, 호혜성, 정의 사랑의 친절 등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성에서 나오는 것이어야지, 소유를 위해 경쟁한다든가, 재산을 축적한다든가, 우리 자신만의 안전을 위한 시설이나 아성을 구축한다든가, 우리의 힘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곧바로 피조물의 탄식과 가난한 민중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것을 촉구한다.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와사회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위기는 풍요로운 생명을 보장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문서는 이러한 사태가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의 핵심으로 보는 자기기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고, "우리의 탐욕과 자기중심적 사고는 인간과 지구를 모두 위험하게 한다"고 진단한다.


문서는 우리에게 죽음을 야기하는 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변혁의 핵심은 탐욕과 이기주의의 죄로부터 떠나 이웃과 온 피조물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생명 선교의 동반자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정의를 실천하고 생명을 촉진할 수 있다.


정의를 향한 우리의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는 주변부로 내 몰리고 제외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비로부터 제외되었을 뿐아니라그들의비참한삶이구조악을 그대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정의의 실천이 무엇인가를 가장 명료하게 가르쳐 주는것은"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 곧 나를 위해 한 일이다."(마25:40)는 말씀이다. 문서는 이와 같은 정의를 실천하는 영성을 "변혁적 영성"(transformative spirituality)이라고 지칭한다.


3) 중첩되고 긴박한 위기 문서는 세계금융위기, 사회경제적 위기, 기후위기, 생태위기가 서로 치명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위기들은 상호 의존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다룰 수 없다. 엄청난 시장 자유화, 탈규제화, 상품과 서비스업의 고삐 풀린 민영화들이 전 생태계를 착취하며, 사회프로그램과 서비스를 해체하고, 경제의 국경을 열어 끝없는 생산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호 연관되어 있는 위기들의 뿌리에는 "탐욕과 불의, 불로소득의 추구, 불의한 기득권,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목적을 희생시키며 얻는 단기수익의 혜택"이 도사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시장 근본주의"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유형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 사회적 도덕적 철학의 문제"이다. "이 이념은 모든 삶의 측면에 침투하여 가족의 삶이나 지역공동체의 삶 속으로 확산되어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을 파괴하면서 자연환경과 전통적인 삶의 형태와 문화를 황폐화시키고 지구의 미래를 망쳐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과 그들의 평화적 공존의 조건 양쪽 모두에 종말을 고하도록 위협한다."


4) 정의의 원천들문서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그러한 신념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만물을 위한 생명의 약속에서 비롯되는 희망에 근거한다.
이러한 신념과 희망을 갖고서 세계 곳곳의 교회들은 세계화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을 나누며 공동의 책임이면서도 또 각각의 책임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연대감을 높이고 전략적 동맹을 맺으며 함께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지표를 설정하고 대 탐욕 투쟁에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불교인들이나 무슬림들과 국제적 대화를 나눈다. 시민사회와 함께 일하는 교회들은 생명농업을 촉진하고 연대경제를 이룩하면서 새로운 국제 금융, 경제 기구의 기준에 대해 토론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여성들은 경제를 사회와, 사회를 경제와 깊이 관련시키는 여성경제와 더불어 가부장적 지배제도에 도전하는 여성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청년들은 검소한 생활과 대안적 삶의 양식을 위한 캠페인의 선두에 서 있다. 토착 원주민들은 사회적 부채와 생태학적 부채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기 위해 땅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들에서 정의의 샘물이 솟구친다.


5) 헌신과 행동의 촉구문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정의와 지속가능성의 영성을 증언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용기"를 갖고서 "만물을 위한 생명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언자적 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변혁의 과정은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확실하게 하는 과정이다.


문서는 이번에 부산에서 열리는 제10차 총회에서 모두를 위한 생명경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공동의 목소리를 내며 에큐메니칼 협력을 강화하며 더 큰 응집을 위해 교회를 불러모으는 일에 WCC가 역할을 하기를 촉구한다. 문서는 특히 신 국제 금융경제기구(정의로운 금융과 생명을 위한 경제에 관한 WCC성명서) 창설과 부의 축적과 조직적 탐욕에 대해 도전하고(탐욕선 연구회 보고서), 생태채무를 교정하고 생태정의를 발전시키는(생태정의와 생태채무에 관한 WCC성명서) 일들이 진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문서는 제10차 부산총회가 지금부터 차기 총회까지의 기간을 따로 정하여 교회가 "<모두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삶을 사는 - 생명경제"(Economy of Life - Living for God's Justice in Creation)에 신앙적 헌신을 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을 요청한다. 끝으로 문서는 "정의로운 금융과 생명경제"에 대한 성명서는 정직, 사회정의, 인간의 존엄성, 상호책임, 생태의 지속성 등과 같은 공동 가치의 구조 속에 기초를 둔 윤리적이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국제 금융 기구의 창립을 요청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곳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생명을 위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3. 문서의 성찰


이 문서는 PWE 논의의 성과들을 수렴하면서 사회경제적 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의 상호 연관성을 다른 어떤 에큐메니칼 문서들보다 더 명료하게 부각시키고자 했다. 또한 문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람들과 피조물 전체의 관계를 생명의 연결망으로 보는 통찰로 에큐메니칼 생명신학이 도달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모두의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경제: 행동촉구의 부름 문서는 누구를 위한 문서인가? 교회 목회자들? 신학자들?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따라 문서의 성격이 달라지고 내용의 구체성에 차이가 난다. 너무 큰 범위를 대상으로 할 경우 전해지는 내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 되고, 모호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좀 더 구체적인 대상을 정하고 그들을 향해 말하고 행동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문서해설에서 강원돈 교수(한신대 사회윤리)는 "문서는 가난과 부와 생태계 위기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피상적이다. 인간의 탐욕의 경제가 사회복지를 해체시키고 생태계 위기를 가져온다는 인식은 문제의 정곡을 찌른 것이지만, 이러한 명제는 서술적인 수준에서 제시되고 있을 뿐, 역사적 · 분석적 설명의 수준에 이르고 있지는 못하다. 만일 경제계와 생태계의 관계를 에너지-물질 대사의 맥락에서 파악하고, 경제계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물질의 형태변화 과정과 소비 과정이 자본의 축적 과정을 매개로 해서 팽창적 성향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가난의 확산과 부의 축적과 생태계 파국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가를 명석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가난을 불러내는 바로 그것이 생태계 파국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게 되고, 사회적 가난과 생태계 위기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시키는 바로 그 장본인이 자본의 축적과 팽창 매커니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분석한다.






하율이 아빠 신학앎

비빔밥과 김치로부터 배우는 비빔의 철학과 비빔의 신학

2013.04.24 17:37

비빔과 김치로 부터 배우는 비빔빔의 철학과 비빔의 신학

정경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 

© BlueKorea.com


우리 한국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비빔밥이다. 오래전 유동식 교수"민속종교와 한국문화"란 책에서 비빔의 철학을 소개한 바 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밥그릇이 있어야 하고 그 그릇의 바닥에는 땅에서 농사를 지은 쌀과 보리로 만든 밥이 깔려 있다. 구운 김이나 달걀과 고기가 다시마 튀김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산해진미랄 것 까지는 없겠으나 산나물과 해초와 날짐승의 알과 쇠고기가 들어 있으니 산과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음식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셈이다. 거기에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것이 비빔밥이다. 매끄럽고 고소한 참기름은 음식에 율동을 준다. 논과 밭 곧 땅에서 거둔 쌀을 적당하게 섞어 지은 밥을 바닥에 깔고 하늘과 땅 사이의 온갖 것을 모아 율동성을 가한 것이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의 음식들을 하나의 밥그릇 속에 모아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빔밥은 단순히 잡다한 여러 가지를 한 곳에 모은 음식이 아니라 비빔이라는 율동 적인 작업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맛이 창조된 음식이다. 중요한 것은 한번 비빔밥이 된 후에 그 잡다한 여러 음식들이 단순하게 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가 된 다는데 있는 것이다. 땅에서 나온 것 산에서 나온 것 바다에서 나온 것 그리고 하늘의 것 곧 천지를 한 그릇 속에 모아놓고 비빔으로써 혼돈의 세계가 된 것이 아니라 각 기 다른 여럿을 함께 비벼서 새로운 하나의 맛을 창조한 것이 비빔밥인 것이다.

© 최승관


이렇게 보면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들이 비빔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김치는 더더욱 비빔밥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치는 밭에서 자란 배추로써 만드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공중에 달린 고추와 배와 밤 등이 들어가고 또 땅 속의 무와 마늘이 들어간다. 게다가 바다의 새우와 고기도 들어가기도 한다. 김치 속에도 바다와 땅과 하늘의 것들이 한 곳에 섞어 손맛으로 잘 비벼 만든 것이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이다. 
그러나 김치가 우리에게 엄청난 가르침을 주는 것은 맛있는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배추가 다섯 번이나 죽는다고 한다. 배추는 첫째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둘째 배추통이 갈라지면서 또 죽고, 셋째 소금에 절여질 때 다시 죽고, 넷째 매운 고추와 짠 젓갈에 범벅돼서 또 다시 죽고, 다섯째 장독에 담겨 땅에 묻히면서 죽어야(요즘은 김치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겠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비빔밥이든 김치이든 모두 비빔의 철학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특유의 음식이다. 이러한 비빔의 철학을 넘어 비빔의 신학을 잘 보여준 성서말씀은 사도행전 2장 44-47절에 나타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교회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교회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교회였다.“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쓴” 교회였다.(42절) 또한 2장 44-47절은 42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을 설명해주는 말씀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대로 서로 배경과 생각과 삶의 형태가 다른 사람들이 신앙으로 만나고 어울리고 섞이고 잘 비벼져서 거룩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상을 함께 나누며 주의 성찬을 나누고,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만들어 가려고 결단하며 나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장 아름다운 맛을 낼 수 있었던 네 가지 중심 메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고 하는 그릇 속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배움, 사랑으로 연대하고 일치하는 친교, 나의 것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식탁 나눔 곧 밥상공동체, 그리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고 그 뜻에 살아가고자 한 기도의 신앙이 들어 있다. 이러한 네 가지의 신앙의 모습 곧 신령한 음식들이 성령으로 비벼져 전혀 새로운 맛을 창출한 비빔밥 곧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거룩한 교회가 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살아간 이러한 신앙과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은 놀라운 일과 기적을 낳게 되었고 이러한 일들이 당시 사람들을 감동으로 사로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현존과 활동을 통해 충만한 생명・정의・평화의 삶이 넘쳐 참된 기쁨과 구원을 맛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이러한 공동체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고, 감동을 주고 엄청난 영향을 끼쳐 누룩처럼 퍼져 사람과 세상을 변화하게 한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맛보게 한 축복의 장소였다. 사도행전 2장 47절“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2장과 4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믿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재산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함께 내어 놓고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들은 소비적인 공동생활에만 중점을 두었지 생산적인 공동생활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위한 공동생산이 없었기에 그 공동체는 오래 유지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함께 노동하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리고 함께 밥상을 나누며 이웃과 세상을 봉사해내는 공동체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셋째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는 엄격한 사유재산제도를 지닌 불평등한 사회구조였다. 그렇기에 빈부의 양극화와 함께 계층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변혁 없이는 특정 집단의 공동체는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시도하였던 것은 그들이 신앙으로 함께 비벼내고자 한 생명・정의・평화 넘치는 새로운 이상사회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새로운 대안 사회를 오고 올 신앙의 사람들에게 제시하면서 몸소 살아간 것이라 하겠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오늘날 심각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그늘 속에서 더욱 빈부의 양극화로 신음하며 울부짖는 우리들의 이웃과 오늘의 세계를 보게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오늘 우리들에게 사회‧경제‧정치‧문화의 양극화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해오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시도하였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어떠한 대안적인 비전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엄숙하게 물어오고 있는 것이다. 


자료출처: 정경호 교수 페이스북 페이지

* 글에 대한 저작권은 정경호 교수님께 있습니다. 
* 다른 곳에 무단 게제를 금합니다. 
* 다른 곳에 게제를 원할 시 댓글로 요청해 주세요. 

하율이 아빠 신학앎 영남신학대학교, 음식신학, 정경호

느림과 멈춤의 나라 쿠바로부터 들려 오는 땅과 강의 이야기

2013.04.05 01:30

느림과 멈춤의 나라 쿠바로부터 들려오는 땅과 강의 이야기

                                                                   Rev. Dr Hong Insik(홍인식 목사)


1. 땅과 강의 위기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요즘 대한민국의 땅과 강의 외마디 소리가 요란하다. 여기저기서 포크레인과 불도저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있는 땅과 강의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아무도 땅과 강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땅과 강의 소리를 듣고 이들의 외침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도대체 대한민국 땅과 강에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땅과 강의 신음 소리가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의 관리들과 고위 공직자들에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 제대로 들려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땅과 강의 신음 소리와 죽음은 우리들의 삶과 후손들의 삶과 더불어 온 인류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갖고 옴에 틀림없는데도 왜 우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2008년에 발생하여 아직도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세계 금융 위기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본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부실로 시작된 국제 금융 경제 위기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 시켰다. 특별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가하는 문제는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의 분석을 내 놓고 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내 놓은 원인분석의 내용 중에서 신앙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번 금융위기의 배후에는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image

유종일 교수는 Terry Burnam의 Mean Markets and the Lizard Brain을 인용하면서 “탐욕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충동적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원초적 감정 중의 하나로서 탐욕이 지배하는 금융 시장에서의 실제행동을 연구한 결과 지극히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금융 위기의 배후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듯이 오늘 땅과 강의 신음소리가 들려지지 않는 이유의 배후에도 인간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 이웃의 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다. 아니 탐욕은 우리의 귀를 애써 막고 있다. 듣지 못하도록 우리의 청각을 마비시키고 있다. 탐욕이 문제이다.


이렇듯 오늘의 경제위기와 더불어서 땅과 강의 위기와 신음은 근본적으로 이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출발되어지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영성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과 강의 문제로 대변되는 생태계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나는 본 글에서 땅과 강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탐욕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는 전혀 다른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 쿠바에서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탐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쿠바의 삶의 모습: 사회주의 쿠바가 남긴 유산



쿠바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이다. 특히 미국의 50년이 넘는 경제봉쇄 정책으로 인하여 다른 국가들과의 통상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이다. 특히 1990년대 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구(舊)소련의 붕괴는 쿠바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하였다. 쿠바는 이 시기를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로 명명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개방정책을 구사하는 등 많은 자구 노력을 기울였다.


image


특별히 이 기간에 도입된 관광 사업에 의한 외화유치는 쿠바로 하여금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이룩되었던 전통적 가치에 대한 포기를 강요하기도 하였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을 용이하게 만들기도 하는 부정적인 결과도 가져왔다. 이러한 쿠바의 경제위기 극복 노력은 1959년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 쿠바 사회를 형성하여 왔던 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게 만들었고 많은 부분에서 전통적인 삶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지금의 쿠바의 모습은 1959년 혁명 이후 유지해 왔던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많이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인적인 가치관보다는 공동체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살고 있는 쿠바인들의 삶의 모습은 오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본 글에서는 나의 쿠바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쿠바에서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어떻게 우리의 탐욕의 조절에 도움을 줄 것인가를 밝히게 될 것이다.


① 물질의 번영을 넘어서는 따뜻한 인간의 정이 흐르는 인간중심의 인간화 사회
관광 사업 도입이후 쿠바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달러의 위력을 국민들이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필요한 물질의 충족을 넘어서서 잠재되어 있던 많은 물질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일으켰다. 필요에 의한 물질 사용에 익숙해 있던 쿠바인들에게 물질 소유 개념은 그들의 삶에서 많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쿠바인들에게도 물질에 대한 소유와 번영은 관심을 크는 가장 중요한 삶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를 지배했던 사회주의의 *새로운 인간론(Hombre Nuevo)*은 여전히 이들에게 핵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image


새로운 인간은 누구인가?


“진정한 혁명은 인간 내부에 있다. 이웃에게 탐욕을 부리는 늑대 같은 인간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제는 ‘새로운 인간’의 시대다. 도덕적인 동기에서 일을 시작하고 끊임없는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자신의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인간이다.” 


체 게바라 Che Guevara 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따뜻한 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한 탐욕은 우리의 삶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쿠바는 아직도 경제발전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개념에서 출발시키고 있다. Economia Humana(인간적인 경제)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인간론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적인 경제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자연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인간적인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쿠바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경제적 성장과 이익창출로 인하여 파헤쳐진 땅과 강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언제나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는 땅과 강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을 향한 따듯한 정이 흐르고 있는 쿠바 사회는 탐욕으로 뒤덮여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수단으로 생각하며 땅과 강을 경제적 이익 창출의 개념으로만 바라보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② 개인에 앞서서 서로의 사랑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정신
어느 날 늦은 밥이었다. 갑자기 나의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경이다. 깜짝 놀라 문을 여니 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미안한 기색으로 학생은 나에게 항생제와 해열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 정도라면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아침이 되어서 부탁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약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학생 하나가 찾아 온 것이 아니었다. 신학대학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든 것처럼 나의 방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알고 보니 마을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서 약을 구하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일반 비상약이 귀한 쿠바에서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한 아기의 아픔이 전 마을 사람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가 쿠바 사회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image


③ 욕망의 제한
땅과 강이 신음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욕망에 있음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과연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인간의 욕망 제어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욕망이 자라서 죄가 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제어의 문제는 신학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어질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쿠바 사회는 욕망의 문제를 제도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 가를 살펴보자.


쿠바는 1991년 특별시기를 거치면서 관광을 개방하면서 외국관광객과 달러 유입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관광산업이 국가의 주 수입원으로 등장하면서 그때까지 국영이었던 기업들에게서도 약간의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개인 소유의 기업의 허용이 그것이다. 음식점과 숙박업을 개인들에게도 개방한 것이다. 개인 소유의 사업의 허용은 쿠바인들 사이에서 소득의 격차를 가져오게 되었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개인 자영업을 운영하게 된 쿠바인들은 좀 더 많은 소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칫하면 개인 자영업의 허용으로 말미암아 자본축적에 대한 욕구가 봇물 터지듯이 나올 뻔 한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쿠바 정부가 택한 정책은 개인 자영업을 허용하되 그 한계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image


첫째로 사업의 영역이다. 소규모의 음식점과 숙박업에 한하여 개인 자영업을 허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무엇보다도 사업의 규모이다. 음식점의 경우에는 실내에 설치할 수 있는 의자의 규모를 12개로 한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숙박업의 경우에는 객실 두 개로 한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개인 자영업의 무한정한 확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놓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제도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하여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욕망의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쿠바에서의 이 같은 제도는 욕망의 무한한 확산을 용인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곱씹어 볼 만한 시도가 아닌가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없는 욕망의 확산은 결국 우리 모두를 신음하게 만들고 있고 우리의 삶의 터전이고 우리의 친구인 자연의 세계, 땅과 강으로 하여금 시음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 저런 제도를 구상하면서 인간의 한없는 욕망이 확산을 제어할 방도가 어디에 있는 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욕망의 제어는 인류와 그리고 자연, 땅과 강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④ 사유재산의 공공성 확보
사유재산은 절대적이며 신성한 것인가? 이 질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사유재산의 신성함과 절대성에 대한 인정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사유재산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쿠바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쿠바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주택 및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이 인정되고 있고 또한 재산권에 대한 상속권도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쿠바인들은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주택과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획득한 사유재산원은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image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에서 주택과 토지에 대한 사유 재산권을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개념이다. 특히 부동산에 대한 소유와 사용에 대한 권리이지 그것을 판매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집과 주택은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임의로 판매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유는 가능하지만 판매는 불가능한 모순적인 제도가 쿠바의 사유재산제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택과 토지는 개인의 것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공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에 대한 공공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제도로 인하여 주택과 토지를 이용한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토지 구입과 판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판매는 금지되어 있지만 같은 조건 하에서 서로 부동산을 교환하는 제도는 허용하고 있어서 소규모적이기는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교환을 이용한 시세 차익을 노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인한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를 하지 않고 있다. 오늘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땅과 강의 문제, 생태계의 문제 또한 이러한 사유 재산에 대한 절대성과 신성화로부터 기인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세계를 친구로 하락해 더불어 살게 하셨다. 이러한 땅과 강과의 더불어 삶은 사유재산이 절대화 되고 신성시 되는 제도 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쿠바의 사유재산의 공공성 확보에 대한 제도는 비록 그것이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유재산의 절대화와 신성화로 발생하고 있는 인간성의 파괴와 땅과 강의 신음 등 생태계의 파멸의 문제에 일정한 형태의 해결책을 마련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유재산의 공공성 확보의 제도로 인하여 쿠바 정부는 지금도 생태계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되도록 인간의 손이 조금 가는 형태로 자연을 보존하고 있다. 경제논리에 의한 부문별한 자연 훼손은 쿠바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쿠바 사회가 남긴 유산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⑤ 물질을 극복하는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 하는 정신적 사회의 건설
⑥ 평등사회의 추구: 소유 재산과 소득의 균형을 이룸
⑦ 소외 없는 사회 건설의 시도: 교육, 의료, 주택 등.


3. 나가는 말



쿠바의 삶은 느리다. 모든 면에서 느리다. 빠름에 익숙해 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쿠바는 미칠 정도로 느리다. 우리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생각으로 오늘의 삶을 빠르게 살고자 한다. 그러나 쿠바인들은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빠르게 살지 않는다. 느리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인간중심의 인간화 삶이 가능할 지도 모르다. 느림이 있기에 사랑과 협력과 연대가 가능하고 사유재산의 공공성이 인정되는지도 모른다. 느림이 있기에 욕망의 확신도 느려지는 것이 아닐까. 쿠바의 느림의 삶은 땅과 강에게도 쉼을 주고 있다. 본래 땅과 강은 느림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느림의 상징인 땅과 강이 느림의 나라인 쿠바에서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쿠바와 더불어 조화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쿠바의 삶은 멈춤이다. 마치 시계가 멈춤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바나 중심가를 걷고 있으면 마치 17세기의 유럽을 걷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 당시의 건물과 그 당시의 거리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걸어가는 느낌을 준다. 경제발전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던 쿠바는 멈춤을 실천 할 수 있었다. 오늘 멈춤이 없는 한국 사회가 모든 과거의 건물을 철거하고 앞만 보고 달린 결과로 황량한 서울을 만들어 놓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멈춤이 있었기에 땅과 강도 그대로 멈추어 있다. 경제발전의 논리에 의해서 멈춤 없이 개발되어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땅과 강과는 대조적이다.


image


오늘 쿠바는 여전히 가난하다. 그리고 자본의 유입으로 인간의 욕망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쿠바가 이러한 자본주의 욕망으로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지켜 낼 수 있을 것인가는 큰 의문으로 남는다.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록 가난하지만 쿠바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중요한 가치관들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크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리의 사회에서 쿠바의 실험적인 제도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손해가 아닐 수 없고 또 위기일 수밖에 없다. 사람과 그리고 땅과 강을 포함한 생태계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에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쿠바 사회의 실험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계속되어지기를 바라고 또 인류가 현명하다면 쿠바 사회의 실험이 인류에게 중요한 대안적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이 실험이 계속되어 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쿠바 혁명 50주년을 맞이해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이 뒤를 이은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혁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건합니다. 이는 결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조차도 한 번도 그 원칙들을 지키는데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만약 누군가 삶 자체가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피곤해졌다거나 심지어 그들의 역사를 부정할 때 조차도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제 위험이 줄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황상으로도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우리가 반세기의 승리의 역사를 축하하는 때가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투쟁을 계속해야 할 다음 20년의 미래에 대해 성찰할 대입니다. 당면한 세계의 위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가올 시간이 우리에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Raul Castro, 2009년 1월 1일 혁명 50주년 기념식에서)


그렇다.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인류가 경쟁이 아닌 협력과 상생으로 더 잘 살아갈 수 있고 그리고 땅과 강, 그리고 온 생태계가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며 더 이상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신음하고 고통 받지 않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는 기독교 희망의 가장 중요한 모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적 희망을 죽음을 넘어서는 단순한 개인적인 구원만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이 사회를 향하여 “더 나는 사회”의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 본 글의 저작권은 홍인식 목사님께 있습니다. 
  • 본 글은 2010년 오이코스 여름학교에서 홍인식 목사님이 강의하신 원고 내용을 그대로 옮겼고 사진만 블로그 운영자가 추가했습니다. 
  • 다른 곳에 글을 싣고 싶으신 분은 홍인식 목사님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댓글로 요청해 주세요.)


느림과 멈춤의 땅 쿠바

하율이 아빠 신학앎 신자유주의, 오이코스 여름학교, 쿠바, 해방신학, 홍인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