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 1. WCC는 성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WCC란 무엇인가?)

2013.06.03 10:00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Ⅱ.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1. WCC는 성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사도적 복음(the Gospel Tradition)은 성경과 교회전통들의 원천과 통일성이다(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1963). 1927년 제1차 로잔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고, 무엇보다 구약 안에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어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Ⅱ. 9-11).1


이상과 같은 ‘복음’은 세상을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로서 성경의 중심 메시지이다. 이 “복음”은 인간을 “신앙”에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이 없으신 사랑으로서 정통 기독론적기고 정통 삼위일체론적인 틀 안에서 주어졌다. 바로 이 “복음”을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함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이다.

그런 즉, 신구약성경에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1978년 벵갈 문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는 두 개의 책 묶음 속에서 하나의 주제에 의해 함께 모아진 다양한 많은 책들의 모음집이다. 우리는 그것들 속에서 전 창조세계와 민족들과 개개인의 삶을 다루고 계시는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구약과 신약의 다양한 증언들 안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분은 바로 그 분이시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의 특정 민족을 다루시며 그 민족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다루시는 그분을 만난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그의 가장 충만하고 결정적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그분을 본질적으로 만난다. 성서의 이 하나님은 세계를 보전하고 그가 그것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존재를 자신의 파트너로 원하시는 분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라고 말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104-105)2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에 따르면, 이상과 같은 ‘복음’(the Gospel Tradition)을 중심으로 하는 혹은 그것을 통일성으로 하는 성경은 ‘복음’에 대한 증언들로서 영감 된 말씀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있다.

성경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묶여진 책들은 역사의 과정 전체를 통하여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문학적 통일체( a literary unity)를 이루었다. 어떤 저작들은 포함되고 여타의 저작들은 제외된 사실은 교회역사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정경은 다양한 증언들을 모아 놓았고 석의의 역사를 결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었다.(84)


그러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각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신약의 특수성을 6가지로 본다.

첫째로 신약성서의 특수성은 구약을 능가하는 한에 있어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그분의 모습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자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그의 동반자로 삼기 위함이다. (108)

둘째로 “말씀 그 자체가 육체가 된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친숙한 방법으로 자신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속에 자신을 관여시키셨다.”(108)

셋째로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그의 독특한 희생적 삶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고, 모든 인간이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러 놓으셨다. 그런즉, 구약의 제사법과 규례들은 그것의 적합성을 상실하였다.(108)

넷째는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고 약속된 미래 지향적인 초역사적 정의와 평화의 샬롬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 개인의 삶과 우주적인 역사의 궁극적인 운명이 명시되어졌다. 삶과 역사가 이 세상의 한계 안에서 완성될 수 없으며,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이고, 역사의 최종적 목표가 모든 것의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넘어선 세계의 전체적인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죽음의 최종성에 대한 구약의 믿음과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경세가 죽음 이편의 삶으로 제한된다고 하는 구약의 믿음이 대치되고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완전한 평화와 정의의 세계에 대한 구약의 희망은 변화되어져서, 그것의 완성은 역사를 넘어서고 있다. (108-19)

다섯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송된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은바 됨에 따라, 향후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 보편적인 차원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합체시키시고, 이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을 세계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로 삼으시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성서가 살아있게 하신다. “따라서 구약성서 안에서 한 특정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있는 관심은 모든 세계에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정의가 더 이상 한 민족 안에 제한되어지지 않고, 거룩한 전쟁이나 정복한 적들을 진멸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거부되어 진다.”(109)

여섯째로 “구약성서를 능가하는 신약성서 속의 많은 것들이 미미 구약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둘째로 「...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구약의 특징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신약을 능가하는 구약의 특수성에 다름 아닌데,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시요,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시는 심판자라고 하는 것을 구약으로부터 알게 된다.”(112)

둘째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위엄과 은폐성이 강조되어 있고, 세계정치에 대한 관심과 질투하심이라 불리는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셋째로 구약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들이 우주 안에서 하나의 관리인으로 자리 매김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더 큰 관심들이 나타나 있고, 우상숭배 유혹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고 있으며, ...“.

넷째로 개인도덕과 개인주의적 윤리가 아니라 구조 악과 구조적인 변혁에 대한 요구들이 있으니, “사회의 구조들에 대한 관심, 정의에 대한 요구, 빈곤과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 하나님에 의해 버려짐에 대한 슬픔과 불평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매일의 삶을 위해 지혜를 부여하는 신앙의 중요성, ...”.

다섯째로 신약은 개인주의적이고 수직적이며 영적인 반면 구약은 공동체적이고 수평적이며 현세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네 번째에서 언급된 구약의 특수성들)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의 철저 화, 그것과 부합되는 삶의 개인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 보다 덜 분명하게 주목을 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구약의 요소들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무시될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맥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 그런즉,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이며 이상적인 틀 안에 갇힐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약이 그것의 목적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세계적 차원에서 윤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보다 구약성서의 넓이와 깊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113)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 제2판)은 아래에서 이와 같은 복음의 증언들로서 성서의 영감을 3가지로 지적할 때, “성경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영감이다”라고 본다. 이는 적어도 이상의 3문서들에서 소개된 방식의 해석에 따른 성서의 내용이지만 말이다.

1. 성서는 파생적이지 않으며(non-derivative) 원형적인(archetypal)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격상 독특하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어느 한 구릅이 구약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독특한 것이며, 따라서 동양종교로부터 파생되어 질 수 없다고 하였다. ...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서는 거듭 반복해서 신앙의 원천으로서 입증되어 졌다. 이러한 이유로 성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것의 주장에 대해 복종해야 함을 주장할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

3. ... 연구보고서들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며,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위한 그 어떤 외부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포기하는 데에 동의한다. 권위는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86-87)3


다시 말하면 본 저서는 영감론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들을 감화시키는 성경의 메시지를 중요시한다. 적어도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사도들의 복음전승과 그것에 대한 증언들일 것이다. 아래의 인용을 읽어 보자.

만약에 확실하게 성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주장이 사람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체험되어 진다면, 성경 뒤에는 하나님 자신, 즉 성령의 활동하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가 아닌가? ... (87-88)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등 성경해석자들은 결국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내용으로 우리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성서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해석이 성경이 성령의 저작물로 알도록 인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영향을 준 영감 받은 증인들의 긴 연속선을 기억해야만 한다. 첫 번째 증인들은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고 감화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의 마지막 최종 형태가 부여된 후, 성경해석자들의 증거는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마치 성령께서 예전에 그의 증인들을 부르셨듯이, 그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필요불가결한 증거들을 나타내게 될 때 그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신앙과 순종과 증거를 일깨우실 것이다. 성령은 교회 안에 살아계신다. ... (88-89)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의 통일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아울러 그것의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경으로서의 성경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즉, 우리는 본문비평과 역사 비평적 방법을 통한 다양한 석의에 의하여 본문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면서 ‘복음 전승’(the Gospel Tradition)에서 통일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에 비추어 볼 때, WCC가 성서를 타종교들의 경전과 동격(同格)과 동가(同價)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1. 8) “Christian World Communions”, In Dictionary of Ecumenical Movement(Geneva: WCC, 1991), , 156 이하.
  2. 9)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
  3. 10)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 엘렌 플레세만 - 반 리어 역음/이형기 옮김(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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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TI(Korean Ecumenical Theological Institute) 참가자 모집

2013.06.03 09:30

WCC 총회 기간 중에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 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에큐메니칼 신학 교육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매 총회 때 마다 WCC는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원(Global Ecumenical Theological Institute, GETI)를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 회원 교회로부터 참가자를 신청 받아 선발하여 대회 기간 중 에큐메니칼 신학 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GETI에 참석을 하게 되면 전 세계에서 선발 된 신학교수님들과 수업, 총회 개최 국가 탐방, 지역교회 탐방, 홈 스테이, WCC 회의장 방문 등 여러 특권(?)을 누리며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명으로 제한된 인원 선발과 수업에 관련 된 모든 것들이 영어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참가 선발에 떨어지거나 신학적 소양은 있으나 언어의 문제로 참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WCC, WCC 제9차 총회 중에 열린 ‘신학카페’, 포르토 알레그레


이번 WCC 10차 부산총회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GETI에 참석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총회 기간 중 한국에큐메니칼 신학원(Korean Ecumenical Theological Institute, KETI)를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KETI의 진행 방식은 GETI와 거의 비슷하며 다른점이 있다면 수업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한국어로 진행이 됩니다. :-) 또한 총회 기간 중 GETI 학생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 되어 있습니다.


기간은 2013년 10월 30일 ~ 11월 8일까지 이며 주말은 제외 됩니다. 모집 인원은 160명이며 등록비는 20만원입니다. 신청자격요건은 신대원에 재학중인 학생, 신학대학교 학부생과 일반대학교 기독교 학부생(이화여대 기독교학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등)인 경우 에큐메니칼 신학운동과 관련된 경력이 있는 학생은 누구나 지원하실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은 6월 22일(원래는 6월 10일까지 였으나 연장 됐습니다.)까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자세한 사항은 첨부된 파일과 WCC 한국준비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

온라인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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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 3.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WCC란 무엇인가?)

2013.05.3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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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3.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류와 창조세계를 자신에게 화해시키셨으니, 이와 같은 화해의 복음사건 자체가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요한복음 17:21절에서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과 창조세계를 자신과의 영원한 코이노니아에 초대하심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지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역사적 필연성에서 생기기 전에 성경 메시지 그 자체 내에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또한 역사적인 필연성에서 생긴 것도 사실(史實)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교회 시대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교구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통하여 이단들에 대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단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가 분열될 위기들에 직면했을 때, 공의회들의 교리결정들이 그것을 해결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좀 더 근대적인 기원은 19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에 힘입은 세계 복음전도에 있었다. 즉,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여러 교파들은 상호 간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고, 교파에 대한 정체성보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라투렛(Scott Latourette) 교회사 교수는 1817-1914년까지의 유럽과 북미의 역사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19세기에 개신교의 복음 선교가 절정에 도달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에 선교의 현장에서 교파들의 협력이 요청되었고, 교파를 초월하는 ‘복음’ 전파가 필요했다는 말이다.1

그리하여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의 폐막식에서 필리핀의 선교사로서 미국의 성공회 주교인 브렌트가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운동을 제안하여, 이 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신앙과 직제’ 운동이 등장하였고,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직전에 스웨덴의 루터교 주교인 죄더불럼이 “평화에의 호소문”을 전쟁 당사국들의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 교회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가 1921년엔 ‘국제선교 협의회’(IMC)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WCC에 가담하면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위원회’(CWME)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리하여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 운동’이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을 결정하였다.2 그런즉, 결국 WCC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된 흐름은 셋인데, 이는 요한복음 17: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을 믿게 하옵소서)과 골로새서 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과 에베소서 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 나오는 성경구절로 요약될 수 있 다. 그런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상과 같이 3흐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1920년엔 동방정교회가 “국제연합”(The League of Nations)에 맞먹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ton ecclesion)를 제안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죄더불럼과 올드헴 역시 교회들의 연합체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제1차 삶과 봉사 운동 세계대회가, 그리고 1927년에 로잔에서 제1차 신앙과 직제세계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대회의 대표들이 결국 1937년 케버트(McCrea Cavert)가 제안한 ‘WCC’(세계교회협의회)란 용어를 받아들여,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에서 WCC헌장이 작성되었다. 그 교리헌장(the Basis)은 성육신 교리와 칼세돈의 정통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였고, 1961년 뉴델리 WCC 때에는 성공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첨부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3

세계교회협의회란 성경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4


그리고 하라레 WCC 보고서는 WCC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였다.


WCC 안에서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의 주된 목적은 서로가 서로를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친교에 있어서 가시적 일치에 이르게 해야 하고,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배와 삶으로,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을 통하여 표현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이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일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교회들은 신앙과 삶, 증언과 섬김으로 코이노니아를 추구함에 있어서 WCC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할 것이다.
- 상호간의 책임지기의 정신으로 용서와 화해, 신학적 대화를 통한 좀 더 심오한 관계의 발전, 그리고 상호 간에 인간적이고 영적이며 물질적인 자원을 함께 나누기를 기도 가운데 증진할 것이다.
- 각 장소와 모든 장소들에서 공동증언을 촉진하고 선교와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할 것이다.
-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사람들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며 정의와 평화 가운데 하나의 인류가족을 진척시키고 창조세계의 보전을 지속시킴으로써 섬김(diakonia)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표현하여,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삶의 충만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 교육과정을 통하여 에큐메니칼 의식을 고취시키고 각각의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안에서의 생명과 삶에 대한 비전을 키워나갈 것이다.
-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에서 그리고 타 신앙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도울 것이다.
- 일치, 예배, 선교와 섬김에 있어서 갱신과 성장을 도모할 것이다.






  1. 1) 참고: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Ⅱ,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5, 1334-1345. 1349-1380.
  2. 2) 이 세 흐름에 관하여는 참고: 이형기,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에 나타난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3. 3) “World Council of Churches”, Nicholas Lossky and Others(ed.),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Geneva: WCC Publications, 1991), 1084.
  4. 4) Ibid.


하율이 아빠 WCC 10th Assembly in Pusan(WCC 제 10차 총회)/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WCC, 에큐메니칼, 이형기 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경적인 의미(WCC란 무엇인가?)

2013.05.29 21:00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경적인 의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인류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시는 대제사장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코이노니아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 역시 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를 누리기(analogia trinitatis)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끝부분에 있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게 복음전파를 부탁하신 것이다. 즉, 교회일체를 위한 주님의 기도 목적은 교회의 복음전파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1:13-2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자들의 구속 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와 온 우주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대체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영역일 것이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로새서 1장 13~20절)



교회의 역사는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요 일치추구의 역사이다. 교파들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교리들과 직제들과 사회참여의 방법들이 다르다. 그러나 성경과 전통은 우리들에게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제시한다.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신약의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통일성에 해당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메시지들이 있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교파들의 다양한 전통들이 있으니, 우리는 성경과 전통들 차원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서, 교파들과 교파들의 신학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룸으로써, 역사와 창조세계를 하나님께 화해케 하는 과제(골 1:20절과 엡 1:10)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에 나타난 에큐메니즘은 아래에서 기술할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성경적 근거이다.






하율이 아빠 WCC 10th Assembly in Pusan(WCC 제 10차 총회)/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WCC, 에큐메니칼, 이형기 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 1. 에큐메니칼이란 말의 뜻(WCC란 무엇인가?)

2013.05.29 16:25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에큐메니칼이란 말의 뜻: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시티(ecumenicity) 및 에큐메니칼이란 단어는 희랍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oikos(집)인데, 이로부터 oikonomia(집안 살림살이 = managing of the household)란 말이 나왔고, 이루부터 economy(경제, 그리고 신학에선 ‘경세’)와 ecology(생태학)란 말이 나왔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the whole inhabited world)이다. 희랍-로마 세계(the Greco-Roman World)에서 이 “오이쿠메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 문명세계 혹은 희랍-로마 문화영역, 나아가서는 로마 제국을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선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로 15회 가량 사용되었고, 2-3세기에 이르면 이 용어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 속에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세계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4세기에서 5세기 동안에는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처음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말은 획기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그것은 교회들의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 교회의 사회참여에 해당하는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선교를 추구하는 “복음전도와 세계선교” 운동과, 이 세 운동의 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세 운동이 WCC의 세 기둥인 바, 이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구로서 세계교회들의 공식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1975년 ‘나이로비 세계교회 협의회’의 JPSS(A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 = 하나의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 이후 오이쿠메네의 의미는 창조세계 보전 차원에서 온 우주를 아우르고 타 종교들과의 대화도 포함하고 있다. 1983년 벤쿠버 WCC 총회 이래 오늘날 세계교회의 중심과제는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가 되었다.





하율이 아빠 WCC 10th Assembly in Pusan(WCC 제 10차 총회)/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WCC, 에큐메니칼, 이형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