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평화기행 1월 16일(소토메, 나가사키) -上-

2013.03.22 03:03


소토메 바다(사진: ©하율이 아빠)


고쿠라교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우리는 4시간을 달려 나가사키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멀미와 함께 지나 소토메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을 했다.
여행을 오기 전 "나가사키 교회군 순례기"란 책을 읽었는데, 그 책 54페이지를 보면 소토메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탁 트인 바다와 작은 섬들, 요철처럼 들쑥날쑥한 복잡한 해안이 나타났다.
작은 곶들이 수평의 받에 수직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노을의 명소인 '석양의 언덕 소토메' 휴게소이다. 이 휴게소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노을
만이 아니다. 이곳엔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다."
 

우리는 석양을 보기에는 너무 이른 아침에 소토메에 도착을 했다.
한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과 같은 소토메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었다.
가톨릭, 추기경, 가난, 순교, 가쿠레 기리시탄, 엔도 슈사쿠, 침묵 등….

 


(사진: ©이은재)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 된 이후로 소토메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1만 5천여 명 중 30%의 인구가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래서 나카사키 사람들은 이곳을 '신앙의 고촌'이라고 부른다. 단지 가톨릭 신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 추기경을 두 명(다구치 요시고로, 사토와키 아시지로)이나 배출을 했다. 일본에서 추기경으로 임명 된 분들이 총 5명이었으니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의 가톨릭을 이끈 추기경을 2명이 나왔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 ©하율이 아빠)


소토메 도한 우리는 가장 먼저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들렸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소설가이다. 1955년 발표한 ≪백인≫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을 수상하고 ≪바다와 독약≫으로 일본 문학가로 자리를 굳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침묵≫, ≪여자의 일생≫, ≪사해의 언저리≫,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엔도 슈사쿠 하면 떠오르게 만드는 책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막부 시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의 박해를 주제로 그리고 소토메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엔도 슈사쿠(사진: ©하율이 아빠)


엔도 슈사쿠는 이 소설을 통해서 "하느님 때문에 고통 당하는 민중을 외면하는 그분이 무기력한 분인가?", "의지가 약하여 배교한 자를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난할 수 있는가?" 등을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독자가 마음 깊숙히 생각을 하여야지만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후미에 (사진: ©이은재)


일본의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 가게 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배교를 강요 당한 가톨릭 신자가 배교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한낱 납덩어리에 불과해서 눈 한번 감고 밟고 지나 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1600년 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 보지만 글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하지만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순교와 배교의 고민의 무게는 훨씬 더 커지게 된다.
 

"밟아라,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 하느니라."
 
 

이 구절은 ≪침묵≫의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기 전 주님이 로드리고 신부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침묵을 읽으면서 로드리고 신부의 강인한 순교 정신에 감동을 했지만 ≪침묵≫을 읽으면 읽을 수록 나약한 인간(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동안 얼마나 고상한척 하면서 살았는지를 돌아 보게 해주 었다.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고 배우고 있는 전도사인데, 신학에 이제야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신학도인데 그동안 나는 정말 바리새인처럼, 율법교사처럼 행동을 하고 있던 모습을 엔도 슈사쿠는 깨닫게 해주었다.

 


(사진: ©이은재)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는 그동안 엔도 슈사쿠가 쓴 작품을 읽을 수 있고 그동안 그가 모은 많은 자료들을 보관해져 있다. 전날 다녀왔던 마츠모토 세이초의 기념관과 달리 이곳은 정말 소박했다.

 

 
 
엔도 슈사쿠 기념관 내부((사진: ©하율이 아빠)


오랜시간 동안 깨알 같이 모은 자료들이 모여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 엔도 슈사쿠가 죽은 뒤에도 이곳을 찾아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엔도 슈사쿠의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었다. 단 한가지 이곳의 흠이 있다면 모든 설명이 일본어로만 되어 있었다. 영어로라도 설명이 되어 있었으면 조금은 더듬더듬 엔도 슈사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같이 간 대성이가 한문을 너무나 잘 읽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고 덕분에 조금은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사진: ©하율이 아빠)


바로 이곳이 소토메 바다의 석양을 즐길 수 있는 휴게소이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과 바로 붙어 있다. 이곳에서 마신 커피는 어제 에온 스퀘어에서 마신 커피보다 훨씬 더 맛이 좋았다. 소토메의 바다를 보면서 마셔서 인지 아니면 바리스타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전을 피곤하게 달려 온 우리에게 너무 큰 힘이 되는 커피였다.

 


침묵의 비(사진: ©하율이 아빠)


커피로부터 힘을 얻은 우리는 소토메를 방문하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바로 "침묵의 비"다. 이 비석에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파랗습니다." 라고 글이 세겨져 있다. 이 말 한마디로 로드리고 신부의 아픈 마음을 모두 표현해 준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지금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아프게 다가 가는 말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 가운데 있는데 저 바다는 너무 아름다기만 하니….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만을 당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인간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며 그 침묵 너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진: ©하율이 아빠) 


하나님은 그 침묵 너머로 우리의 아픔은 누구보다도 더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그 고난을 받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때 하나님은 밟히기 위해서, 아픔은 나누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은 단지 밟고 지나가는 그 발이 아픈 것으로만 충분하다라고 위로 하신다. 맨발로 가시 밭을 지나니 않는 이상 평평한 후미에를 밟는다고 발이 아플까? 그 발이 아프지 않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찾은 소토메의 바다는 아름답다라기 보다는 너무나 서슬퍼렇게 보였다. 마치 인간의 아픔을 비웃는 것 처럼 말이다. 

 


시츠교회(사진: ©하율이 아빠)


다음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시츠교회이다. 이곳은 소토메에 제일 처음 세워진 교회이다. 프랑스 출신의 도로신부가 1882년에 세웠다. 도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명문가 출신이였지만 숱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소토메에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옛날 소토메는 육지의 고도라 불리우며 육지와 고립된 지역이었고 한다. 너무나 가난한 이 마을에 한 사람의 신부가 오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로 신부 사진 왼쪽(사진: ©이은재)


도로 신부는 이곳에 정어리 공장, 빵과 국수 제분 공장을 만들고 방파제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마카로니 공장도 세웠다. 또 전염병이 유행하자 구조원과 약국을 개설해 의료사업까지 펼쳤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목판, 석판화를 찍어 교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과 문화에 까지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도로 신부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이 시츠교회에서는 2명의 추기경과 300여 명의 성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시츠교회 내부(사진: ©하율이 아빠)


도로 신부와 소토메의 신앙인의 수고와 노력으로 지어진 시츠교회는 너무나 소박했다. 이곳은 멋진 양복에 반짝이는 로퍼를 신고 거기에 좋은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 보다 오히려 이곳은 옷과 신에 흙이 조금 뭍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농부와 바닷물 냄새가 물씬 풍기며 그물을 끌어 올리느라 손이 거칠어진 어부가 일을 하다가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곳이었다. 

 


(사진: ©하율이 아빠) iPhone 4s Panorama photo


우리는 교회를 건축할 때 주변과 잘 어울리는 건물을 거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튀는 모습으로 건축을 한다. 예를 들면 뾰쪽 솟은 교회 탑과 그 위에서 켜져 있는 빨간 네온 십자가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지만 글쎄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츠교회의 전경은 마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치 소토메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지어 졌던 것처럼 말이다. 



 
 
(사진: ©하율이 아빠)


교회 밖을 둘러 보면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졌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비록 아름답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소토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교인들의 마음이 담겨진 시츠교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진: ©하율이 아빠)


교회 뒷쪽으로 가면 성모 상이 두 손을 모으고 마을을 바라 보고 있다. 하늘 색과 교회의 건물 색, 그리고 성모 상의 색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성모 상을 바락보고 있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다. "주님 도로 신부의 헌신이 헛 되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나도 기도가 나왔다. "주여 성모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사진: ©하율이 아빠)


일본에 오기 전부터 오상열 목사님은 배부르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는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 곳을 갈 줄 알았는데 둘째 날 점심 때 그곳을 가게 되었다. 스시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은 아니었고 저렴한 가격에 런치 메뉴가 제공되는 뷔폐였다.

늘상 뷔폐를 찾을 때는 적당히 먹으리라는 마음을 가지며 찾아 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조절이 안 된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와서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미 한계가 왔음에 불구하고 계속 먹게 된다. 

 

 
(사진: ©하율이 아빠)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적당히 먹을 걸 이러면서 뱃살이 늘어 날 것을 걱정하고, 소화가 다 되지 않아서 다음 끼니를 거르고, 다시 끼니 때가 지나면 배가 고파 지면서 뷔폐에서 다 먹지 못하고 나온 음식을 그리워 하며 다음에 가면 꼭 그 음식을 먹으리라 다짐을 한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손을 보면 어느새 뱃살을 늘려 주는 인스턴트 식품을 손에 쥐고 있다. 뷔폐에서 나오면서 걱정을 했던 뱃살의 고민은 없어지고 주린 배를 체우려고 하는 한 인간이 서 있을 뿐….

 


(사진: ©하율이 아빠)


소식을 한다는 일본인들에게 뷔폐가 아이러니 했지만 뷔폐에 올라온 음식의 모양과 그 음식을 담는 접시를 보니 역시 소식을 하는 것 같았다. 회는 정말 조금씩 작게 떠서 올려 줬다 일본 사람들은 두세 점씩 가지고 갔지만 우린 그런 인내심이 없었다. 먹고 싶은 만큼 막 접시에 담아서 가지고 왔다. 처음엔 회를 뜨시던 조리사 아저씨의 표정은 괜찮았지만 갈 수록 표정이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먹는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기 때문 인 것 같다. 늦게나마 "스미마센…. " 해요 조리사님 :-)

 


(사진: ©하율이 아빠) iPhone 4s Panorama photo


깔끔하고 맛있는 회와 여러 다른 음식을 배불리 먹은 우리는 이제 나가사키 시내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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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자료관과 26성인 기념관을 방문한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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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율이 아빠 Oikos/Oikos Treavel 나카사키, 소토메, 여행학교, 오이코스, 일본, 평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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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6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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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가 되어 각자 받은 1000엔으로 근처의 한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행 중 잠시나마 자유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려고 머리에 머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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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1000엔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12000원 정도 하는 금액

사실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면 돈이 있어야 한다. 모든 곳의 물가가 균등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것은 천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 각자의 나라에서 기준으로 삼는 금액이 다르니

물가도 제각각일 수 밖에…

요지는 식사 금액을 잘 책정을 해야 남는 돈을 가지고 커피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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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부터 4층을 세 번이나 돌았다. 저렴하고 먹을 만한 식당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제일 처음 들렸던 식당으로 우린 다시 돌아 왔다.

옷을 살 때도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보면 항상 처음 인상 깊게 봤던 곳으로 다시 돌아 오는 걸 보면

식당도 그런가 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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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식당에 들어 와서도 무엇을 먹을지 몰라 메뉴판을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일본어 공부 좀 열심히 할걸 후회를 하면서 결국 고른 것은 그날의 런치 스페셜 메뉴였다.

이름도 모른다. 다만 따뜻한 국물이 있는 것을 원했지만, 끓이다가 쫄아버린 듯한 국물에 면발이 살짝

올려 져서 나왔다. 맛은 그런데로 괜찮았지만 한국 사람인 내가 먹기에도 많이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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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고 아껴서 대략 700엔짜리 점심을 먹고 우린 그곳에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지 말지를 또 고민을 하다가

식당 바로 옆에 조금 더 싼 카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장 그 카페로 이동을 했다.

일본어와 영어의 만남은 정말 난감 했다.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서로의 발음 현명하게 차이가 났다.

"We want 핫 coffee.", "핫 coffee??", "Yes, 핫 coffee please.", "????"

HOT을 우리는 '핫'이라고 일본은 '호또' 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냥 'HOT'을 'HOTTO'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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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말이 통해서 주문 한 커피의 가격은 대략 260엔 점심을 먹고 남은 돈으로 충분히 남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돈이었다. 커피의 가격은 우리나라의 카페들과 비슷한 가격이었지만 그 양은

대략 1/2 정도 그리고 각자 느끼는 맛이 달랐지만 대충 우리는 '커피가 탄 것 같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여름에 편의점에서 1200원을 주고 살 수 있는 커피 맛이었다.

우리나라의 아메리카노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일본의 커피 맛은 우리들이 즐기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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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우리는 고쿠라 시내를 관광을 했다. 다큐멘터리로만 봤던 일본의 고성을 직접 보았다.

그 크기와 그들만의 독특한 건물 양식이 성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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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부로 들어 오면 1층은 옛 고쿠라 성의 모습을 꾸며 놓은 미니어쳐가 있고

2층으로 올라 오면 에도시대의 무사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가마 타보기 실제 무사들이 사용했던 칼을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칼을 들어 보니까 무개가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이런 칼을 들고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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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라 성을 나오면 바로 옆에 고쿠라 성 정원이 있다. 정원 내 가장 유명한 건물은 일본의 전통 양식으로 지은

서원동이다. 여름과 가을에 시원한 바람을 쐐면서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한다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쿠라를 방문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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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라 시내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숙소인 재일한인 고쿠라 교회로 갔다.

사실 난 일본의 호텔에서 하루를 지내 보고 싶었지만 일본의 호텔을 경험해 보신 신재식 교수님께서

교회에서 제공해 주는 게스트 하우스가 훨씬 더 좋을 거라고 하셨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장윤재 교수님(이화여대)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모두 머물 수 있냐고 강력히 물어 보셨다.

잠시 뒤 난 교수님들이 왜 게스트 하우스를 추천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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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머문 게스트 하우스는 넓은 공간, 밝은 조명, 넓은 화장실, 그리고 와이파이가 빵빵하게 터졌다.

일본에 와서 사진을 찍어도 페북에 올릴 수도 없고 집으로 전화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 하지만 호텔은 좁은 방, 어두운 조명, 좁은 화장실, 그리고 와이파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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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각자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가마모토 목사님께 청황제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가마모토 목사님은

원래 일본 국사 선생님이었는데 은퇴 후 다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주문홍 목사님은 가마모토 목사님이 일본의 몇 안되는 양심적은 시람으로서 일본이 인정하지 않는 과거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 알리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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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이란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며 에도 막부는 막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입헌군주 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헌법을 제정을하고 그 헌법에 천황을 신으로 명시하였다.

국가신토를 국교로 하는 일본제국이 탄생을 한 것이다. 모든 종교에는 교리를 정하여 공동체를 운영을 하고 구성원들을 신앙을 교육시킨다.

국가신토에도 이러한 질서가 있는데 쉽게 나열을 해보겠다.

신=천황, 찬송가=기미가요(군가), 전도=교육기관과 신사, 실천윤리=이민족에 대한 정복 전쟁

이러한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제의 전쟁은 거룩한 신앙행위 였다. 그래서 모든 군인은 철저한 국가신토의 정신교육을 받고

전쟁에 투입 됐다고 한다. 일제의 군대는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윤리, 일반 국민들은 천황의 자식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을 했다고 하니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미국의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가미카제는 우리에게는 어이없는 자살행위 였지만 그들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그리고 일제는 천황을 위해서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군신(軍神)으로 정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 시켰다. 마지막으로 천황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한다.

가마모토 목사님은 천황제가 아직도 일본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니 평화를 외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이러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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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모토 목사님의 천황제의 설명은 내가 야하다 제철소에서 가졌던 그 의문점을 해소 시켜 주었다.

왜 재일한국인들이 차별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는지, 왜 수많은 사람들을 정복 전쟁으로 내 몰았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망언을 서슴 없이 내 뱉는지를 알게 되었다.

과연 평화란 무엇일까? 미국의 초정밀 미사일의 이름이 피스 메이커(Peace Maker)인데, 강한 힘으로 상대방을 억제 시키는 것이 평화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일본으로 평화기행을 갔기 때문에 고민은 여기까지….

사실은 배고픔과 피로가 더 이상의 뇌의 노동을 가로 막았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 난 평화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

고쿠라교회에서 마련해 주신 저녁 만찬에 참석을 하였다.

 

첫날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보다 여행기를 적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끝까지 가보렵니다. :-)

 

 

 

하율이 아빠 Oikos/Oikos Treavel 오이코스, 오이코스 여행학교, 평화기행

일본 평화기행 1월 14~15일(부산, 시모노세키, 기타규슈) -上-

2013.02.11 22:42
부산, 시모노세키, 기타규슈


늘상 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 먹어볼 음식, 그리고 가는 도중에 볼 수 있는 풍경들…

그래서 난 매일 오고 가는 나주와 광주의 그 길도 늘 설렌 마음으로 다닌다.


그런데 이번 일본 평화기행은 시작부터 다른 여행과는 조금 색다른 여행이었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휴전선 때문에 섬나라와 같은 우리나라에서 외국을 간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처음 이 모습은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출국" 옆에 있는 배 이미지는 정말 신기하게만 보였다.


국제여객선터미널을 처음 사용을 해보는 것이여서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지만 출국수속을 하는 것은 공항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출입국신고서 작성, 보안검색대, 출국심사, 그리고 탑승이 아닌 승선의 순서를 거쳤다.


일본 평화기행(이하 평화기행)은 기독교평화센터 오상열 목사님이 한국과 일본을 3년 동안 오고가면서 오랜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 만드신 여행이다. 사실 우리가 여행을 간다는 것은 휴양과 관광의 목적이 가장 크다. 그러나 이번 평화기행은 휴양과 관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여행을 통해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린 평화기행을 떠나기 전 3권의 책과 오상열 목사님이 보내주신 여러 자료를 읽으며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려 나갔다. 

드디어 1월 14일 우린 부산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 갔다.


우린 배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조금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사실 평화기행을 떠난 우리는 여러 학교에서 모였기 때문에 서로 조금 어색한 사이였다.

오상열 목사님은 여행기간 동안에 서로 "전도사님" 이란 호칭이 형님, 언니, 오빠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식사가 끝난 뒤 우리는 "나는 왜 평회기행을 떠나는가?"를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중요한 것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호칭은 점점 전도사님에서 언니, 오빠, 형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전날 부산을 출발한 우리는 배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을 했다.

전날 한국에서의 날씨는 좋기만 해서 겨울 바다가 포근하게만 보였는데 일본의 날씨가 그리 썩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온 우리를 반겨주신 분은 먼저 도착하신 신재식 교수님(호남신대)과

고쿠라에서 재일한인 고쿠라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주문홍 목사님이셨다.

멋지게 기른 수염과 정갈하게 넘기신 머리, 그리고 한복이 정말 인상적이였다. 나중에 주문홍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목사님은 한복을 입고 다니셨고 한복을 입고 우리를 마중 나오셨다.


시모노세키국제여객선 터미널을 나와서 우리가 제일 처음 들린 곳은 바로 일청강화조약기념관이였다.

이곳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서의 패권을 두고 다툰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는 곳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 이홍장은 이곳에 와서 청일전쟁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고

전통적으로 조선에서 행사해 오던 권력을 일본에게 넘겨 주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근대화의 성공을 여실 없이 보여준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후대에 기리길 보여 주고 싶어서인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장소를 그대로 보존을 해놓고 있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청나라가 이겼다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국은 기울어 있는 조선이었지만 그래도 일본의 지배는 당하지 않았을 수 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홍장은 이 조약을 끝으로 중국에서 몰락을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의 제1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이자 조선통독부의 통감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고 일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화폐(1964~1984)에 그의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 구국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한국과 중국에게는 원수와 같은 인물이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여 사망하였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나와 우리가 간곳은 영생원이었다. 영생원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당해

북규슈, 찌구호지구에서 탄광노동을 하다 죽은 조선인들과 북규슈의 동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이다. 영생원을 세운 사람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고 최창환 목사이다.


이곳에는 대략 157기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 유골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잘 정돈이 된 곳에 안치 되어 있지 않았다. 1974년 고 최창환 목사가 허름한 절간의 한 박스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조선인들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일부 유골은 유족이 확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 갔지만 대부분은 일제시대 강제연행을 당해 신원을 알 수 없고, 이름은 있지만 유가족을 찾지 못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안치된 분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후반… 젊은 날에 낯선 이국으로 끌려와서 사람 대접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며 죽어간 우리 조상들의 마음이 마음 깊숙히 느껴졌다.

 


주문홍 목사님은 "30세가 채 못 된 나이들입니다. 제 명도 못 살고 죽은 셈이죠. 이분들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남은 우리 사람들의 책무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은 유골도 꼭 가족의 품으로 돌려 보낼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고 위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를 이제 말해보려고 한다.

일본이 패망을 한 뒤 강제징용 당한 이들 중 일부는 한국과 북한으로 돌아 갔지만 한반도 내의 여러가지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서 귀국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일본은 이들에게 자국민의 지위를 주지 않고 외국인의 지위를 부여 했다.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와서 죽도록 일본을 위해서 일을 했지만 그들에게 준 것이라곤 외국인등록증 하나 뿐이 었다. 그래서 재일한국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의 구성인으로 살아가지만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차별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국인 등록증을 항시 휴대해야 하며, 국공립학교 교원 채용시 국적을 적어야 한다.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동포들은 3등 국민으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일동포 가운데는 운동선수, 가수, 야쿠자가 많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일본내에서는 그들의 지위를 인정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이현세 씨의 만화에서 재일한국인이 귀화의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았는데 귀화가 별거냐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름마져 일본식을 고쳐야 하는 귀화는 재일동포에게 자신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는 일본인 입니다."라고 선포하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이었다.

 


영생원 밖으로 나와 다시 본 일본인들의 묘지는 새롭게 보였다.

잘 관리되어 가지런하고 찾는이들이 많아 외롭지 않는 묘였지만 영생원은 찾은이가 극히 적은 곳이었다. 그것도 가족이 아닌 일면식이 없는 동포들이 찾아주는 곳….

죽어서도 약자를 둘러 싸고 있는 강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묘지를 통해서 비춰 졌다.

 



영생원에서의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우린 또 다른 조선인들이 뭍힌 곳으로 이동을 했다. 바로 오다야먀 묘지다.

조선인조난자위령비… 말 그대로 조난을 당한 조선인들을 위로하는 비가 있는 곳이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일본은 강제징용 때 자국으로 한국인을 데리고 오는 것만을 생각 했지 본국으로 돌아 가려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와 하카다 항구 등에서 큰 배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고국으로 돌아 가려고 기타큐슈 와카마츠 항에서 소형 배를 구해 타고 떠나려고 했지만 승선인원 초과로 물에 빠지는 사람이 부지기수 였다고 한다.



먼저 이 사진을 꼭 확대해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애절한 상황을 조금이나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고향을 향한 마음이 간절한 만큼 주변 상황이 이들을 어렵게만 만들었다.

결국 9월 중순에 일본에 온 마쿠라자키 태풍이 이름모를 배를 타고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던 이들을 와카마즈 앞 바다를 건너가던 이들을 덮쳤고 다음날 아침 100여구 넘는 시체가 항구로 몰려 왔다고 한다.

 



먼저 이 사진을 꼭 확대해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애절한 상황을 조금이나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여성은 바지모습, 남자는 작업복이었고 어린아이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시체는 그 다음 날도 떠밀려 왔고 탑승자 명단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배를 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중 80여구의 시체를 이곳에 묻었는데, 분봉도 없고 그저 평평한 땅일 뿐이었다.

 


그나마 이 위령비도 1981년 강제연행 희생자들에 대한 시민운동이 시작돼 10년 동안 기타규슈시를 상대로 교섭 끝에 겨우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령비에도, 안내문 어디를 봐도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성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위령비 곁에 부산을 향하여 외롭게 서 있는 솟대가 이곳에 뭍힌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오전 동안 잠깐 지나 다녔던 곳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오다야마 묘지에 관련 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그대 외롭지 않으리"라는 시를 읽고 나서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차로 돌아 왔다.

 

다음으로 우리가 들린 곳은 일본의 제일(first) 제철소인 야하다 제철소를 들렸다.

야하다 제철소는 1901년에 설립이 되어 많은 철을 생산해 냈다.

이곳에서 생산 된 철은 철도, 조선, 군수 산업에 제공이 되어 일본 군국주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중간 중간 주문홍 목사님의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 야하다 제철소에도 강제징용을 당해 온 조선인이 무려 600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어떤 보상도 보장도 없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 되었던 이들…

어쩌면 이곳에서 노동착취를 당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은 영생원 아니면 오다야먀 묘지에 뭍혀 있을 지도 모른다. 왜 일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렸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도무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상편 끝 하편에서 계속 되어 집니다.

사진 때문에 스크롤 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


하율이 아빠 Oikos/Oikos Treavel 여행학교, 오이코스, 평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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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무엘

    저또한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그때의 감동을 되새기네요!

  2. 그렇지 사무엘...
    나도 다시 사진을 꺼내서 기행문을 쓰는데
    마음 한 구석이 아파 오더라구

    아무튼 이제 소토메의 기억을 떠 올릴 차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