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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와 21세기 선악과

2014.09.01 13:00

세계보건기구(WHO)가 이와 관련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지금 세계는 치사율에 육박하는 에볼라(Ebola)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에볼라는 콩고의 에볼라란 마을에서년에 처음 나타난 바이러스로 인간에게 처음 나타난 바이러스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넓게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이슈가 되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동시다발로 나타나고 세계 다른 지역으로까지 퍼질 염려가 있으니 난리들이다. 그런데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년대 중반에 카나다 의학계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원인규명을 해서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후 에볼라가 심각하지 않아 이 연구는 흐지부지되었거나 감추어진 것 같다. 그 연구에 따르면 에볼라는 원숭이를 통해 매개된 것 같은데 인간이 아프리카 깊은 밀림지역을 마구잡이로 벌목하면서 파괴하니까 이 바이러스가 원숭이에게 잠입하고 인간이 감염원숭이와 접촉하면서 인간에게 옮겨진 것으로 본다는 분석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에볼라는 바로 인간의 생태파괴에 대한 질병인 셈이다.


90년대 말 세계는 새천년을 맞이한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 때인데 2000년 1월 둘째주일 인류는 새 천년을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설교를 제네바한인교회에서 한 적이 있다. 이 설교에서 에볼라에 관한 언급을 할 부분이 있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눈다.


새 천년과 선악과

본문: 창세기 3:1-19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어라!” 이것은 제네바에서 시작된 개혁교회 -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라 부름 - 가 강조하는 신앙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한손에 신문을 들라는 것은 “때의 징조를 분별하라”는 마태복음 24:3의 말씀대로 항상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피라는 의미이고 다른 손에 성경을 들라는 것은 그 시대에 향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지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온 인류가 기다리던 새 천년이 밝았습니다. 새 천년이라고 해서 어제와 전혀 다른 시대가 온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새 천년이 되면 인간의 삶이 여러 면에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21세기, 새 천년은 “정보화시대가 될 것이다.”, “감성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식사회가 될 것이다.” 는등 많은 예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만 이 모든 예견들을 종합해 보면 대체로 두 가지의 상반된 예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하나는 21세기에는 획기적인 과학기술의 발달로 아주 살기좋고 편리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재앙과 혼란이 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미래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한 손에 신문을 들라는 말대로 오늘 현실의 징조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른 손에 성경을 들라는 말대로 이 시대의 징조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분별해야 새 천년에 대한 바른 삶의 지표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I
그럼 먼저 신문을 들어보십니다. 오늘 세계 현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세계에는 두 가지 지배적인 교훈(Discourse)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흐름을 주도하는 교훈입니다. 세계화는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그 주도는 경제세계화가 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등 세계경제기구 주역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만 이 흐름의 배경에는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이 세상과 인간의 개발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끝없이 발전할 수 있으며 무역과 시장을 자유화하면 경제가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고 경제가 발전하면 세계는 가난에서 해방되고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경제는 시장을 완전 자유경쟁 시킬 때 가장 잘 성장한다는 소위 자유시장 (Free market) 경제 논리를 내세워 모든 무역장벽을 없애고 전 세계를 완전 무한 자유경쟁으로 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사고입니다.

신자유주의를 학문적으로 전면에서 주도하고 있는 학자중에 일본계 미국인 프란시스 후구야마(Francis Fukuyama)란 학자가 있습니다. 후꾸야마에 의하면 역사를 움직이는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경제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경제를 완전히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놓아두면 경제가 자연히 역사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가 바로 이 방안이란 것입니다.

둘째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투쟁력’ (Struggle for recognition)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그 투쟁력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투쟁에는 자연히 인간의 갈등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간본성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공학, 특히 신경약물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리탈린(Ritalin)이나 프로작(Prozac) 같은 정신순화약을 투입하면 인간의 거친 본성이 순한 본성으로 개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물을 투입하면 남자나 여자나 모두 순한 양처럼 성격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후꾸야마는 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간본성이 개조되면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고 인간에게는 불행의 역사가 더 이상 없는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이 사람의 논문이 세계 학계에서 심도있게 토론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이론에 반해서 제기되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교훈은 ‘인간의 개발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계가 있고 인간의 기술과 과학은 무제한으로 오만방자하게 발전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개발하면 제한된 지구 자원이 얼마 안가서 거들나며 우리 후손들은 사막화된 지구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기후가 자꾸 올라가는 지구온난화 (Global warming)는 인간이 생산해 내는 가스가 한계치를 넘어 오존층을 파괴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앞으로 이 가스의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 자체가 위협당할 수 있다고 유엔 세계기후회의(UN World Climate Conference)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말 제가 1986년 처음 제네바에 왔을 때는 자동차 에어콘이나 선풍기가 필요없었는데 요 몇 년 사이에는 이것 없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습니다.

이처럼 지구 자원과 인간기술의 발전, 부의 축적에는 한계가 있어야 하며 그 개발도 세계가 지속가능한 범위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인간과 세계는 무한정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와 인간의 기술 개발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이 두 논리가 바로 오늘 신문에 실리고 있는 시대의 징조입니다.

II
그러면 이러한 세계 현실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바로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고 ‘동산에 있는 다른 나무의 실과는 다 먹을 수 있으나 이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뱀이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고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와가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것도 같아서 자기가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반대였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 보다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죽 모든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안에서 늘 논쟁거리가 되었던 말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을 아셨을텐데도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이 죄를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함정을 만들어서 인간을 시험하셨는가? 선악과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 아닌가?’ 등 수많은 원초적인 의문을 제시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문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이 선악과의 이야기를 오늘 끝없는 부의 추구, 끝없는 기술의 추구, 끝없는 개발의 추구가 이제는 부매랑이 되어 생태계를 위협하고 우리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읽어보면 너무나도 정확하고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III
그럼 이 말씀은 오늘 21세기 문턱을 들어서는 인간문명에 과연 무슨 계시를 하고 있습니까? 이 선악과의 말씀이 딜렘마에 빠진 20세기 인간문명에 대해 하는 말씀은 바로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질주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발전은 무한하며 인간은 한없이 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주역들의 논리를 들어보면 뱀의 유혹처럼 정말 달콤하게 들립니다. 그 논리를 듣고 있으면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느꼈던 것 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기루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이를 세계의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아시안 타이거 중의 하나로 경이적인 경제성장의 모델이었다고 추앙받아왔던 신화는 하루 아침에 무너졌습니다.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러시아, 브라질을 차례대로 강타한 경제위기는 국가경제구조의 취약성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세계화가 안고 있는 위험성이라면서 세계 어디에든지 찾아 올 수 있는 타격을 이들 나라가 먼저 당한 것이라는 분석이 자꾸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의 경우, 경제기반의 30%가 무너졌고 부실기업이 도산한 것은 물론, 국가기간산업까지 포함해서 상당히 건실한 기업들이 헐값으로 외국자본에 팔린 상태입니다. 지금 한국정부는 경제위기가 이미 극복되었다고 선전합니다만 제가 지난 11월 세계 경제학자들과 함께 한국과 태국에서 경제회의를 했는데 외환보유액, 증시, 환율등은 그렇게 나타나는 듯 하지만 밑바닥 경제는 그렇지 않고 있고 학계도, 서민들도, 소수를 제외한 기업인들도 다 이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경제위기이후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고 범죄율과 자살율은 30% 이상 증가하고 사회불안율도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났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후꾸야마의 논리는 그야말로 망상입니다. 인간역사에 경제가 적지 않는 역할을 하긴 하였으나 인간 역사의 발전은 결코 경제만으로 이루어 져 온 것이 아닙니다. 많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몰락에 이어 만약 자본주의가 이대로 간다면 자본주의도 그 끝을 비참한 모양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끝을 모르고 치닫는 탐욕적 경제, 잘못된 인간의 가치관이 그대로 달린다면 인류와 세계의 미래엔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약물로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에이즈나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고칠 약품도 계발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 사회는 마약문제로 점점 더 심각한 상태에 봉착할 것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에이즈(AIDS)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짐바브웨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700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 에이즈(AIDS)외에도 걸리면 2일내에 즉사하는 에볼라(Ebola)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연구해 보니 이런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바이러스(Virus)는 깊은 밀림속에 살고 있었는데 인간이 목재체취를 위해 밀림을 밀어버리니까 그 미생물이 살 곳을 잃어 원숭이 속에 들어가고 그 원숭이를 통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들은 인간개발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IV
그러면 전혀 개발하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많은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따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주어져 있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에볼라(Ebola)와 같은 바이러스의 출현을 저는 생태계 질서를 파괴한 결과의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살도록 주어진 영역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먹고 살도록 자유가 주어졌으나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 먹지 말라는 그 실과까지 따 먹는 오늘날 인간의 무소부위의 개발은 생태계 질서 파괴를 불러오고 이 결과로 오는 자연의 무서운 재앙앞에서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루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경제에도 적용됩니다. 인간의 부(富)가 끝이 없이 추구되면 그 다음에는 마태복음 6:24 말씀대로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소위 물신사상(物神思想: Mammonism)이 싹트고 그렇게 되면 돈이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돈을 섬기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개발을 자제해야 할 한계가 무엇인가? 저는 이 개발에 대한 과학적인 한계는 모르겠습니다. 과학기술의 개발, 생명공학의 개발, 어디까지 가야하나, 그 한계는 과학자가 아닌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원칙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나서 나타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이 결과는 다름아닌 모든 관계가 깨어져 나가는 결과였습니다.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심판자와 죄인의 관계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도록 맺어진 사이였으나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배신의 관계로 변합니다. 셋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원래는 사람이 수고하지 않아도 땅이 먹을 것을 제공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땀흘려 경작해야만 땅은 곡식을 내고, 그것도 순순히 곡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엉겅퀴를 내면서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뱀은 인간의 뒷 발꿈치를 물고 인간은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관계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극적인 결과에서 우리는 인간의 개발은 어디까지여야 하느냐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개발은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하기 전”까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있으면 ‘한계가 왔구나’하고 절감해야 합니다.

몇 년전에 미국에 공부하라고 보낸 아들이 신용카드를 마음대로 못쓰게 한다고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부모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한국에서 있었는데 이것이 한계를 넘어 관계가 깨어지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면 돈의 축적은 여기에서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V
우리 인간은 이제 무작정 개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움속에 사는 멋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몇 년 전에 ‘아름다운 푸름(La Belle Verte)’란 불란서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자연과 인간의 진실을 파괴하는 산업화와 문명을 다 거치고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한 다른 별의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와서 자기들이 걸었던 길을 똑 같이 걷고 있는 지구의 문명에 경고하고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문명으로 바꾸도록 도전하는 영화였습니다.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여성이 핸드빽을 들고 외출하려는데 외계인이 핸드빽에 담겨진 입술연지통을 보고 ‘이것이 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바르는 것이다.’라고 하니까 ‘왜 아름답게 보여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지구여성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외계여성이 화장대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니까, ‘그럼 당신이 집에 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입술연지를 안바르다가 왜 밖에 나가면서는 바르느냐?’고 묻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의 집 사람은 우리 가정이 그렇지 않나 상상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가정의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한국여성들은 집에 있을 때는 귀신같이 하고 있다가 밖에 나갈 때는 패션모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변해서 나갑니다. 요즈음 한국에 가보면 여성들이 화장을 많이 하는데 분을 너무 두껍게 발라서 우스워도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웃는 부자연스러움을 보게 됩니다. 북한에 가니까 여성들의 피부가 화장을 안해서 그런지 정말 깨끗했는데 화장도 좀 자연스럽게 하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당연하지도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인간이 날마다 개발하고 있는 것들이 전부 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필요한 것도 있지만 사실 필요치 않는 것도 많습니다. 앞으로 지구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우리 후손들도 쓸 자원을 남겨두기 위해서 이 세대의 인류는 검소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세계를 보면 기계적인 관계는 점점 더 넓고 견고하게 맺어지고 있습니다. 통신은 우주까지 연결되고 인터넷, 핸드폰등 기계적 관계는 정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까지 무한정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인격적 관계는 어떻습니까? 점점 멀어지고 있고, 약해지고, 끊어져 가고 있습니다. 순수한 인간관계는 찾아보기 힘들고 이익과 관련된 억지관계만 있는 듯 합니다. 2000년 동안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로 이루었지만 인간은 진보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적 근성이 오늘 인간에게도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21세기에 인류가 최대로 기울여야 할 노력은 바로 깨어진 “관계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중대한 선교적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관계회복, 즉 인간의 죄악으로 사이가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길이 곧 인간이 진보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단순히인간의 자율성을 제한하는금지조항(禁止條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안전장치(安全裝置, Security)입니다. 새천년을 맞는 인류는 무엇을 할 때 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인간다음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000년 1월 16일, 제네바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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