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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평화기행 1월 14~15일(부산, 시모노세키, 기타규슈) -上-

부산, 시모노세키, 기타규슈


늘상 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 먹어볼 음식, 그리고 가는 도중에 볼 수 있는 풍경들…

그래서 난 매일 오고 가는 나주와 광주의 그 길도 늘 설렌 마음으로 다닌다.


그런데 이번 일본 평화기행은 시작부터 다른 여행과는 조금 색다른 여행이었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휴전선 때문에 섬나라와 같은 우리나라에서 외국을 간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처음 이 모습은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출국" 옆에 있는 배 이미지는 정말 신기하게만 보였다.


국제여객선터미널을 처음 사용을 해보는 것이여서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지만 출국수속을 하는 것은 공항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출입국신고서 작성, 보안검색대, 출국심사, 그리고 탑승이 아닌 승선의 순서를 거쳤다.


일본 평화기행(이하 평화기행)은 기독교평화센터 오상열 목사님이 한국과 일본을 3년 동안 오고가면서 오랜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 만드신 여행이다. 사실 우리가 여행을 간다는 것은 휴양과 관광의 목적이 가장 크다. 그러나 이번 평화기행은 휴양과 관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여행을 통해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린 평화기행을 떠나기 전 3권의 책과 오상열 목사님이 보내주신 여러 자료를 읽으며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려 나갔다. 

드디어 1월 14일 우린 부산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 갔다.


우린 배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조금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사실 평화기행을 떠난 우리는 여러 학교에서 모였기 때문에 서로 조금 어색한 사이였다.

오상열 목사님은 여행기간 동안에 서로 "전도사님" 이란 호칭이 형님, 언니, 오빠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식사가 끝난 뒤 우리는 "나는 왜 평회기행을 떠나는가?"를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중요한 것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호칭은 점점 전도사님에서 언니, 오빠, 형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전날 부산을 출발한 우리는 배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을 했다.

전날 한국에서의 날씨는 좋기만 해서 겨울 바다가 포근하게만 보였는데 일본의 날씨가 그리 썩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온 우리를 반겨주신 분은 먼저 도착하신 신재식 교수님(호남신대)과

고쿠라에서 재일한인 고쿠라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주문홍 목사님이셨다.

멋지게 기른 수염과 정갈하게 넘기신 머리, 그리고 한복이 정말 인상적이였다. 나중에 주문홍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목사님은 한복을 입고 다니셨고 한복을 입고 우리를 마중 나오셨다.


시모노세키국제여객선 터미널을 나와서 우리가 제일 처음 들린 곳은 바로 일청강화조약기념관이였다.

이곳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서의 패권을 두고 다툰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는 곳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 이홍장은 이곳에 와서 청일전쟁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고

전통적으로 조선에서 행사해 오던 권력을 일본에게 넘겨 주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근대화의 성공을 여실 없이 보여준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후대에 기리길 보여 주고 싶어서인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장소를 그대로 보존을 해놓고 있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청나라가 이겼다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국은 기울어 있는 조선이었지만 그래도 일본의 지배는 당하지 않았을 수 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홍장은 이 조약을 끝으로 중국에서 몰락을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의 제1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이자 조선통독부의 통감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고 일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화폐(1964~1984)에 그의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 구국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한국과 중국에게는 원수와 같은 인물이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여 사망하였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나와 우리가 간곳은 영생원이었다. 영생원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당해

북규슈, 찌구호지구에서 탄광노동을 하다 죽은 조선인들과 북규슈의 동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이다. 영생원을 세운 사람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고 최창환 목사이다.


이곳에는 대략 157기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 유골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잘 정돈이 된 곳에 안치 되어 있지 않았다. 1974년 고 최창환 목사가 허름한 절간의 한 박스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조선인들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일부 유골은 유족이 확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 갔지만 대부분은 일제시대 강제연행을 당해 신원을 알 수 없고, 이름은 있지만 유가족을 찾지 못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안치된 분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후반… 젊은 날에 낯선 이국으로 끌려와서 사람 대접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며 죽어간 우리 조상들의 마음이 마음 깊숙히 느껴졌다.

 


주문홍 목사님은 "30세가 채 못 된 나이들입니다. 제 명도 못 살고 죽은 셈이죠. 이분들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남은 우리 사람들의 책무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은 유골도 꼭 가족의 품으로 돌려 보낼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고 위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를 이제 말해보려고 한다.

일본이 패망을 한 뒤 강제징용 당한 이들 중 일부는 한국과 북한으로 돌아 갔지만 한반도 내의 여러가지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서 귀국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일본은 이들에게 자국민의 지위를 주지 않고 외국인의 지위를 부여 했다.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와서 죽도록 일본을 위해서 일을 했지만 그들에게 준 것이라곤 외국인등록증 하나 뿐이 었다. 그래서 재일한국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의 구성인으로 살아가지만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차별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국인 등록증을 항시 휴대해야 하며, 국공립학교 교원 채용시 국적을 적어야 한다.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동포들은 3등 국민으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일동포 가운데는 운동선수, 가수, 야쿠자가 많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일본내에서는 그들의 지위를 인정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이현세 씨의 만화에서 재일한국인이 귀화의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았는데 귀화가 별거냐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름마져 일본식을 고쳐야 하는 귀화는 재일동포에게 자신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는 일본인 입니다."라고 선포하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이었다.

 


영생원 밖으로 나와 다시 본 일본인들의 묘지는 새롭게 보였다.

잘 관리되어 가지런하고 찾는이들이 많아 외롭지 않는 묘였지만 영생원은 찾은이가 극히 적은 곳이었다. 그것도 가족이 아닌 일면식이 없는 동포들이 찾아주는 곳….

죽어서도 약자를 둘러 싸고 있는 강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묘지를 통해서 비춰 졌다.

 



영생원에서의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우린 또 다른 조선인들이 뭍힌 곳으로 이동을 했다. 바로 오다야먀 묘지다.

조선인조난자위령비… 말 그대로 조난을 당한 조선인들을 위로하는 비가 있는 곳이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일본은 강제징용 때 자국으로 한국인을 데리고 오는 것만을 생각 했지 본국으로 돌아 가려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와 하카다 항구 등에서 큰 배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고국으로 돌아 가려고 기타큐슈 와카마츠 항에서 소형 배를 구해 타고 떠나려고 했지만 승선인원 초과로 물에 빠지는 사람이 부지기수 였다고 한다.



먼저 이 사진을 꼭 확대해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애절한 상황을 조금이나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고향을 향한 마음이 간절한 만큼 주변 상황이 이들을 어렵게만 만들었다.

결국 9월 중순에 일본에 온 마쿠라자키 태풍이 이름모를 배를 타고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던 이들을 와카마즈 앞 바다를 건너가던 이들을 덮쳤고 다음날 아침 100여구 넘는 시체가 항구로 몰려 왔다고 한다.

 



먼저 이 사진을 꼭 확대해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애절한 상황을 조금이나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여성은 바지모습, 남자는 작업복이었고 어린아이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시체는 그 다음 날도 떠밀려 왔고 탑승자 명단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배를 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중 80여구의 시체를 이곳에 묻었는데, 분봉도 없고 그저 평평한 땅일 뿐이었다.

 


그나마 이 위령비도 1981년 강제연행 희생자들에 대한 시민운동이 시작돼 10년 동안 기타규슈시를 상대로 교섭 끝에 겨우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령비에도, 안내문 어디를 봐도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성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위령비 곁에 부산을 향하여 외롭게 서 있는 솟대가 이곳에 뭍힌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오전 동안 잠깐 지나 다녔던 곳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오다야마 묘지에 관련 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그대 외롭지 않으리"라는 시를 읽고 나서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차로 돌아 왔다.

 

다음으로 우리가 들린 곳은 일본의 제일(first) 제철소인 야하다 제철소를 들렸다.

야하다 제철소는 1901년에 설립이 되어 많은 철을 생산해 냈다.

이곳에서 생산 된 철은 철도, 조선, 군수 산업에 제공이 되어 일본 군국주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중간 중간 주문홍 목사님의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 야하다 제철소에도 강제징용을 당해 온 조선인이 무려 600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어떤 보상도 보장도 없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 되었던 이들…

어쩌면 이곳에서 노동착취를 당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은 영생원 아니면 오다야먀 묘지에 뭍혀 있을 지도 모른다. 왜 일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렸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도무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상편 끝 하편에서 계속 되어 집니다.

사진 때문에 스크롤 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