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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평화기행 1월 16일(소토메, 나가사키) -上-


소토메 바다(사진: ©하율이 아빠)


고쿠라교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우리는 4시간을 달려 나가사키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멀미와 함께 지나 소토메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을 했다.
여행을 오기 전 "나가사키 교회군 순례기"란 책을 읽었는데, 그 책 54페이지를 보면 소토메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탁 트인 바다와 작은 섬들, 요철처럼 들쑥날쑥한 복잡한 해안이 나타났다.
작은 곶들이 수평의 받에 수직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노을의 명소인 '석양의 언덕 소토메' 휴게소이다. 이 휴게소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노을
만이 아니다. 이곳엔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다."
 

우리는 석양을 보기에는 너무 이른 아침에 소토메에 도착을 했다.
한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과 같은 소토메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었다.
가톨릭, 추기경, 가난, 순교, 가쿠레 기리시탄, 엔도 슈사쿠, 침묵 등….

 


(사진: ©이은재)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 된 이후로 소토메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1만 5천여 명 중 30%의 인구가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래서 나카사키 사람들은 이곳을 '신앙의 고촌'이라고 부른다. 단지 가톨릭 신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 추기경을 두 명(다구치 요시고로, 사토와키 아시지로)이나 배출을 했다. 일본에서 추기경으로 임명 된 분들이 총 5명이었으니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의 가톨릭을 이끈 추기경을 2명이 나왔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 ©하율이 아빠)


소토메 도한 우리는 가장 먼저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들렸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소설가이다. 1955년 발표한 ≪백인≫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을 수상하고 ≪바다와 독약≫으로 일본 문학가로 자리를 굳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침묵≫, ≪여자의 일생≫, ≪사해의 언저리≫,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엔도 슈사쿠 하면 떠오르게 만드는 책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막부 시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의 박해를 주제로 그리고 소토메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엔도 슈사쿠(사진: ©하율이 아빠)


엔도 슈사쿠는 이 소설을 통해서 "하느님 때문에 고통 당하는 민중을 외면하는 그분이 무기력한 분인가?", "의지가 약하여 배교한 자를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난할 수 있는가?" 등을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독자가 마음 깊숙히 생각을 하여야지만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후미에 (사진: ©이은재)


일본의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 가게 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배교를 강요 당한 가톨릭 신자가 배교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한낱 납덩어리에 불과해서 눈 한번 감고 밟고 지나 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1600년 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 보지만 글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하지만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순교와 배교의 고민의 무게는 훨씬 더 커지게 된다.
 

"밟아라,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 하느니라."
 
 

이 구절은 ≪침묵≫의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기 전 주님이 로드리고 신부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침묵을 읽으면서 로드리고 신부의 강인한 순교 정신에 감동을 했지만 ≪침묵≫을 읽으면 읽을 수록 나약한 인간(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동안 얼마나 고상한척 하면서 살았는지를 돌아 보게 해주 었다.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고 배우고 있는 전도사인데, 신학에 이제야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신학도인데 그동안 나는 정말 바리새인처럼, 율법교사처럼 행동을 하고 있던 모습을 엔도 슈사쿠는 깨닫게 해주었다.

 


(사진: ©이은재)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는 그동안 엔도 슈사쿠가 쓴 작품을 읽을 수 있고 그동안 그가 모은 많은 자료들을 보관해져 있다. 전날 다녀왔던 마츠모토 세이초의 기념관과 달리 이곳은 정말 소박했다.

 

 
 
엔도 슈사쿠 기념관 내부((사진: ©하율이 아빠)


오랜시간 동안 깨알 같이 모은 자료들이 모여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 엔도 슈사쿠가 죽은 뒤에도 이곳을 찾아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엔도 슈사쿠의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었다. 단 한가지 이곳의 흠이 있다면 모든 설명이 일본어로만 되어 있었다. 영어로라도 설명이 되어 있었으면 조금은 더듬더듬 엔도 슈사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같이 간 대성이가 한문을 너무나 잘 읽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고 덕분에 조금은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사진: ©하율이 아빠)


바로 이곳이 소토메 바다의 석양을 즐길 수 있는 휴게소이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과 바로 붙어 있다. 이곳에서 마신 커피는 어제 에온 스퀘어에서 마신 커피보다 훨씬 더 맛이 좋았다. 소토메의 바다를 보면서 마셔서 인지 아니면 바리스타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전을 피곤하게 달려 온 우리에게 너무 큰 힘이 되는 커피였다.

 


침묵의 비(사진: ©하율이 아빠)


커피로부터 힘을 얻은 우리는 소토메를 방문하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바로 "침묵의 비"다. 이 비석에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파랗습니다." 라고 글이 세겨져 있다. 이 말 한마디로 로드리고 신부의 아픈 마음을 모두 표현해 준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지금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아프게 다가 가는 말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 가운데 있는데 저 바다는 너무 아름다기만 하니….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만을 당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인간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며 그 침묵 너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진: ©하율이 아빠) 


하나님은 그 침묵 너머로 우리의 아픔은 누구보다도 더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그 고난을 받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때 하나님은 밟히기 위해서, 아픔은 나누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은 단지 밟고 지나가는 그 발이 아픈 것으로만 충분하다라고 위로 하신다. 맨발로 가시 밭을 지나니 않는 이상 평평한 후미에를 밟는다고 발이 아플까? 그 발이 아프지 않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찾은 소토메의 바다는 아름답다라기 보다는 너무나 서슬퍼렇게 보였다. 마치 인간의 아픔을 비웃는 것 처럼 말이다. 

 


시츠교회(사진: ©하율이 아빠)


다음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시츠교회이다. 이곳은 소토메에 제일 처음 세워진 교회이다. 프랑스 출신의 도로신부가 1882년에 세웠다. 도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명문가 출신이였지만 숱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소토메에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옛날 소토메는 육지의 고도라 불리우며 육지와 고립된 지역이었고 한다. 너무나 가난한 이 마을에 한 사람의 신부가 오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로 신부 사진 왼쪽(사진: ©이은재)


도로 신부는 이곳에 정어리 공장, 빵과 국수 제분 공장을 만들고 방파제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마카로니 공장도 세웠다. 또 전염병이 유행하자 구조원과 약국을 개설해 의료사업까지 펼쳤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목판, 석판화를 찍어 교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과 문화에 까지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도로 신부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이 시츠교회에서는 2명의 추기경과 300여 명의 성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시츠교회 내부(사진: ©하율이 아빠)


도로 신부와 소토메의 신앙인의 수고와 노력으로 지어진 시츠교회는 너무나 소박했다. 이곳은 멋진 양복에 반짝이는 로퍼를 신고 거기에 좋은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 보다 오히려 이곳은 옷과 신에 흙이 조금 뭍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농부와 바닷물 냄새가 물씬 풍기며 그물을 끌어 올리느라 손이 거칠어진 어부가 일을 하다가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곳이었다. 

 


(사진: ©하율이 아빠) iPhone 4s Panorama photo


우리는 교회를 건축할 때 주변과 잘 어울리는 건물을 거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튀는 모습으로 건축을 한다. 예를 들면 뾰쪽 솟은 교회 탑과 그 위에서 켜져 있는 빨간 네온 십자가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지만 글쎄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츠교회의 전경은 마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치 소토메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지어 졌던 것처럼 말이다. 



 
 
(사진: ©하율이 아빠)


교회 밖을 둘러 보면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졌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비록 아름답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소토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교인들의 마음이 담겨진 시츠교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진: ©하율이 아빠)


교회 뒷쪽으로 가면 성모 상이 두 손을 모으고 마을을 바라 보고 있다. 하늘 색과 교회의 건물 색, 그리고 성모 상의 색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성모 상을 바락보고 있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다. "주님 도로 신부의 헌신이 헛 되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나도 기도가 나왔다. "주여 성모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사진: ©하율이 아빠)


일본에 오기 전부터 오상열 목사님은 배부르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는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 곳을 갈 줄 알았는데 둘째 날 점심 때 그곳을 가게 되었다. 스시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은 아니었고 저렴한 가격에 런치 메뉴가 제공되는 뷔폐였다.

늘상 뷔폐를 찾을 때는 적당히 먹으리라는 마음을 가지며 찾아 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조절이 안 된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와서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미 한계가 왔음에 불구하고 계속 먹게 된다. 

 

 
(사진: ©하율이 아빠)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적당히 먹을 걸 이러면서 뱃살이 늘어 날 것을 걱정하고, 소화가 다 되지 않아서 다음 끼니를 거르고, 다시 끼니 때가 지나면 배가 고파 지면서 뷔폐에서 다 먹지 못하고 나온 음식을 그리워 하며 다음에 가면 꼭 그 음식을 먹으리라 다짐을 한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손을 보면 어느새 뱃살을 늘려 주는 인스턴트 식품을 손에 쥐고 있다. 뷔폐에서 나오면서 걱정을 했던 뱃살의 고민은 없어지고 주린 배를 체우려고 하는 한 인간이 서 있을 뿐….

 


(사진: ©하율이 아빠)


소식을 한다는 일본인들에게 뷔폐가 아이러니 했지만 뷔폐에 올라온 음식의 모양과 그 음식을 담는 접시를 보니 역시 소식을 하는 것 같았다. 회는 정말 조금씩 작게 떠서 올려 줬다 일본 사람들은 두세 점씩 가지고 갔지만 우린 그런 인내심이 없었다. 먹고 싶은 만큼 막 접시에 담아서 가지고 왔다. 처음엔 회를 뜨시던 조리사 아저씨의 표정은 괜찮았지만 갈 수록 표정이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먹는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기 때문 인 것 같다. 늦게나마 "스미마센…. " 해요 조리사님 :-)

 


(사진: ©하율이 아빠) iPhone 4s Panorama photo


깔끔하고 맛있는 회와 여러 다른 음식을 배불리 먹은 우리는 이제 나가사키 시내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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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자료관과 26성인 기념관을 방문한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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